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
결국 인천항이 러일전쟁의 개전지로 선택되고 한반도 전역이 일본의 물자 보급로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입었지만,
의외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는 당시 주요 항일 지식인이었던 이승만, 안중근 등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응원한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히 더 지식인들이 친일 성향이었기에 나타는 현상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 반러감정이 팽배해있었고 서양열강으로부터 동아시아가 항전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을 응원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친일파 양성의 기회로 놓칠 일본이 절대 아니었다.
1904년 동학농민운동 잔존파와 독립협회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그 유명한 일진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소위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한국을 문명개화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황실과 정부가 일본에 호응하도록 강요했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반민족행위임이 분명했으나, 기본적으로 일진회는 한국의 문명개화라는 이상을 원했던 단체였고,
그저 일본에 호응한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한일합방을 앞두고 와해되기 시작해 결국 한일합방 직후 토사구팽 당했다.
설립자 중 한명인 이용구가 우치다 료헤이와의 담화에서 언급했듯, 크게 후회했다고 하지만
그 6년 간의 행위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러일전쟁이 개전된 지 약 20여일 후, 일본은 특명전권대사에 하야시 곤스케 당시 주한 일본공사를 임명했다.
이후 하야시 공사는 덕수궁으로 이동해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논의했으며
결국 선술했듯 고종의 중립국 선언은 무시된 채 한국과 일본이 공수동맹을 체결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정부 주요 안건에 일본이 임명한 외국인 고문이 관여했으며,
이러고 얼마 안가 그 유명한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의 화폐정리사업이 진행되었다.
1904년 11월 결국 뤼순이 함락되었고, 1905년(메이지38) 3월 1일 펑톈 역시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일본 입장에서의 대참사가 아니라면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나 다름없었고
설령 발트 함대가 승리를 거둔다해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는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진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승만을 특명전권대사로 하여 미국에 보냈으나
친일파 김윤정의 공작에 의해 이승만은 미국에서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참고로 대통령 이승만 맞음)
1924년(다이쇼13), 미국에서 문서가 하나 공개되었는데,
이는 1905년 일본을 방문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 전쟁부방관과 가쓰라 다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간의 밀약이었다.
즉 1905년 이미 미일 양국은 일본이 한국을, 미국이 필리핀을 점유하는 것은 인정하고 묵인하기로 합의한 상태였으며
다만 그 합의가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즉, 설령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하더라도, 뚜렷한 해결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고 얼마 안가 영일동맹에 수정과 연장을 거친, 2차 영일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1차 영일동맹에서 인정한 양국의 특수한 이익에 대해 그 범위를,
일본은 한반도로, 영국은 극동과 인도로 확대시킨 것으로, 이를 통해 영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용인하게 되었다.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는 다음에 언급하겠다.
러일전쟁이 끝나며 한국을 둘러싼 구도에 일본의 대항마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식민지화를 위한 일련의 단계였고, 그 시작은 조선의 보호국화였다.
1905년 11월, 그 유명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하게 되었으며, 한국 황실에 외교를 담당하는 통감을 상주시켰다.
말이 외교만 담당하는 것이지, 이 조약에 의해 그간 조선이 체결했던 외국과의 모든 조약은 파기당했고,
통감은 이후 양국관계를 이유로 한국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조정의 친일파 관료들(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등)과 외부의 일진회까지 동원해 조정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그렇게 일본 대륙침략의 첫 단추가 꿰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완수하기 위한 일본 정계에서 가장 유능하고 확실한 인물이 초대 통감에 앉는 건 당연했다.
그게 누구냐? 모를 수가 없는 그 인물
이 이후의 이야기는 일본사보다는 한국사에 가까우니 이토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한국 이야기는 최대한 생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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