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현 일본 영토 중 3분의 2가 신정부에 가담했다.
그리고 에도 막부마저도 정권 유지 및 저항을 포기하고 에도 성의 문을 열어버렸다.
이제 남은 번과 군대에게 선택지는 버티고 저항할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
둘 중 하나였다.
아이즈번과 나가오카번은 조슈와 사쓰마만큼은 아닐지라도 서양 무기와 전술 도입에 적극적인 번이었다.
그리고 아이즈번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사생아 호시나 마사유키 가문의 영지로,
가문의 기치 자체가 막부 수호인 곳이다.
여기가 싸움 한번 없이 항복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도호쿠 열번들이 아이즈번과 쇼나이번의 탄원을 해주자고 주장한 세라 쇼조가 천주되기도 했다.
우선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등은 닛코 동조궁에 모여 막부를 위한 총력전을 선언했다.
참고로 닛코 동조궁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사당으로, 이에야스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군대가 집결한 우츠노미야 성이 신정부군의 다음 타겟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막부군이 우츠노미야성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인적 물전 자원 손실이 컸고,
신정부군 본대가 우츠노미야로 향해오자 자력으로 지킬 방법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북으로 북으로 이동하면, 신정부군도 따라서 이동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군대가 나가오카성을 공격했고,
서양식 개틀링 등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나가오카성은 개성된다.
신정부군의 다음타겟은 잔존한 좌막파의 수도이자 오우에츠 열번의 중심지인 아이즈번이었다.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후쿠시마의 거친 지형과 서남지방놈들은 상상도 못할 도호쿠의 추위를 믿었다.
그러니 5개월만 버티면 승산은 있다는 계산으로 보나리 고개에 오토리 게이스케를 파견했다.
오토리 게이스케는 여러겹의 포대를 설치해 신정부군의 공격에 대비했으나
하필 신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된 그날 안개가 심해 포대는 무기력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아이즈성으로 향하는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갈길을 잃은 막부군은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중심으로 에조치로 향하게 되었다.
아이즈성은 어떻게든 방어하고자 했으나 결국 성문을 열었고,
아이즈번이 좌막의 기치를 지키지 못했기에 수많은 아이즈번사들이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막부군이 갈 곳은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갈 곳을 만들어버린다면?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함대는 센다이를 출발해 그대로 마츠마에번(홋카이도 남부, 하코다테 일대)을 공격했다.
1868년 말 마츠마에번은 막부군에 함락되었고,
1869년 초 요시노부 쇼군의 징계 해제와 동시에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하코다테에 에조 공화국을 설립했다.
일본 역사상 유일의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구로다 기요타카를 필두로 한 신정부의 해군은 하코다테로 향했고,
이제는 더이상 막부군이 신정부군에게 저항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히시카타 도시조를 필두로 저항했지만, 신정부군의 무기와 화력에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신정부군은 하코다테 상륙에 성공하고 히지카타 도시조 역시 전사하고 만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에노모토는 이대로 죽기에 아쉬운 인물이라고 판단해 항복을 권유했고,
결국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고료가쿠를 개성하면서 보신전쟁은 끝이 난다.
공교롭게도 보신전쟁에서 막부측에서 활동한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신정부측으로 참전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다니 다테키, 사이고 다카모리, 야마가타 아리토모, 구로다 기요타카 등등은
메이지 신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인재로 중용되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좌막이냐 도막이냐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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