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조약의 유효성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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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 여부한일합방과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본격화되는 조선 침탈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mtw31082.tistory.com위 글에서 나는 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에 대해 말을 흘리듯 결론을 냈다.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에 대해 논할 법학 관련 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과연 그렇다하여 이 조약을 합법적이라 볼 근거가 충분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합법성에 대해 논하며 두 가지 논제를 제시했다.하나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면 광복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다른 하나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면 한일기본조약의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부분을 ..
일본의 수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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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역사 관련
여기서 말하는 수도는 개념 그대로의 수도와 정치적 중심지를 모두 뜻한다.일본은 역사적으로 여러 왕조가 난립한 적이 없어 단순히 수도만 따지면 적을 게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성곽 등의 방어시설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남아있는 경우만 서술한다.이유는 여기로 교토와 나라에는 성곽이 있을까전통시대에 수도라 함은 성곽과 궁궐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돋보인다.서울의 경우 한양도성과 5대궁,개성 역시도 개성부가 외성과 나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안에 만월대가 있었다.중국의mtw31082.tistory.com 아스카시대 이전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 점이 있어 생략한다. 아스카쿄-현 나라현 아스카무라(592~676)'아스카시대'의 그 아스카이다.쇼토쿠 태자가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 고대 사찰의 흔적을 ..
관동군 2개 사단 증설 문제 논의와 가츠라 다로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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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다이쇼
관동주 관동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삼국간섭과 아관파천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mtw31082.tistory.com1912년(다이쇼1) 메이지 덴노가 붕어한 후 국상이 끝나자마자 관동군 2개 사단 증설 문제가 다시 한번 대두되었다.그 중심에는 이시모토 신로쿠 전 육군대신과 함께 사단 증설을 외쳤던 다나키 기이치와신임 육군대신으로 취임한 야마가타파의 유에하라 유사쿠가 있었다.즉, 관동군 2개 사단 증설 문제와 그 논쟁은군, 특히 육군을 일종의 정치적 집단이자 수단으로 여겼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암묵적 지원을 받은 정쟁이라 볼 수 있겠다. 연호가 바뀌었다해서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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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사회민주당은 창당하면서 8대이상을 설정했는데, 그 안에는 부, 교육, 정치적 권한에 대한 만민평등, 토지, 자본, 교통수단 만민공유, 군비 철폐 등이 있었다.딱 봐도 정부가 견제할 명분을 정면에서 제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하루만에 해산된 것이기도 했다. 사회민주당이 해체 직후 고토쿠 슈스이는 정치단체인 헤이민샤(平民社)를 결성했다.헤이민샤는 1903년 평민신문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해 비전론을 주장했고, 1904년에는 공산당 선언을 일역하기도 했다.아 물론 출간하자마자 금지당했다.같은 해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에 가타야마 센이 부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이렇듯 헤이민샤의 좌익활동은 점차 범위와 강도를 넓혀 갔고, 이걸 일본 정부가 좌시할 리가 없었다.특히 비전론이나 고토쿠, 가타야마 등이..
본격화되는 조선 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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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전쟁의 개전지로 선택되고 한반도 전역이 일본의 물자 보급로로 활용되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입었지만,의외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이는 당시 주요 항일 지식인이었던 이승만, 안중근 등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으며,많은 지식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응원한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이것은 단순히 더 지식인들이 친일 성향이었기에 나타는 현상은 아니었다.당시 한국에 반러감정이 팽배해있었고 서양열강으로부터 동아시아가 항전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노기 마레스케와 도고 헤이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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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러일전쟁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몇대가 내mtw31082.tistory.com 노기 마레스케와 도고 헤이하치로러일전재의 성과로 인해 '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라고 불렸고, 육해군의 알력싸움을 감안하면 라이벌 구도가 예상되지만사실 그런 건 딱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을 굳이 꼬집어 다루는 이유는, 이 둘만큼 당시의 일본 육해군을 설명해주는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노기 마레스케는 조슈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1849년생이다.요시다 쇼인이 죽고 쇼카손주쿠에 입학해 기도 다카요시의 먼 후배이자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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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그래도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헌정당(구 자유당계)과 연계하여 전반적인 안건을 원하는대로 통과시켜 나갈 수 있었다.그렇게나 싸워댔던 지조증징 법안은 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직후 통과되었으며,1899년(메이지32)에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 역시 통과되었다.여기서 말하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은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을 말하는 것인데,문관임용령은 정당 소속인의 내각 임용을 금지하는 법이었고, 문관분한령은 내각의 교체에도 국무대신과 관료들의 위치를 보전시켜주는 법이었으니,이는 제..
교토와 나라에는 성곽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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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전통시대에 수도라 함은 성곽과 궁궐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돋보인다.서울의 경우 한양도성과 5대궁,개성 역시도 개성부가 외성과 나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안에 만월대가 있었다.중국의 경우에도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은 이중으로 두꺼운 성벽이 둘러싼 형태 안에 자금성과 중남해가 위치해있었다.유럽의 경우 근대화 및 도시 확장으로 인해 이러한 면모가 퇴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빈의 호프부르크 왕궁,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로마와 프랑스의 주요 궁전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구시가지 내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일반적인 예시일 뿐 예외도 있다.바로 일본이다.이렇게 말을 하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는 과거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 성 자리이며,교토에는 니조성이, 오사카에는 오사카..
와이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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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행적이 성공 혹은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3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는 아군 하나 없이 내각을 구성했고, 결국 얼마 안가 사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정치 감각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그 이후의 행적이 과감하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권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번벌파와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는 민권파(혹은 민당파)로 나뉘었다.민권파는 대동단결운동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테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자..
청일전쟁 직후의 국제정세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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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8) 을미사변이 발생했고,아무리 조선을 쌩무시하던 일본이라지만 일단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둘 수는 없었다.미우라 고로가 귀국된 후 후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내정되었다.무츠 무네미츠의 측근이기도 했던 고무라였기에, 고무라가 조선에서 진행할 임무는 기존 대조선정책의 유지라고 볼 수 있겠다.하지만 얼마 안가 아관파천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조선정책은 큰 변곡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기에고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 내에서 일본이 그간 차지한 권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무라는 즉시 이에 대한 협상을 가졌고, 조선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하나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베베르 고무라 각서'이다. 동년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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