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화되는 조선 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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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전쟁의 개전지로 선택되고 한반도 전역이 일본의 물자 보급로로 활용되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입었지만,의외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이는 당시 주요 항일 지식인이었던 이승만, 안중근 등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으며,많은 지식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응원한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이것은 단순히 더 지식인들이 친일 성향이었기에 나타는 현상은 아니었다.당시 한국에 반러감정이 팽배해있었고 서양열강으로부터 동아시아가 항전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노기 마레스케와 도고 헤이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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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러일전쟁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몇대가 내mtw31082.tistory.com 노기 마레스케와 도고 헤이하치로러일전재의 성과로 인해 '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라고 불렸고, 육해군의 알력싸움을 감안하면 라이벌 구도가 예상되지만사실 그런 건 딱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을 굳이 꼬집어 다루는 이유는, 이 둘만큼 당시의 일본 육해군을 설명해주는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노기 마레스케는 조슈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1849년생이다.요시다 쇼인이 죽고 쇼카손주쿠에 입학해 기도 다카요시의 먼 후배이자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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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그래도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헌정당(구 자유당계)과 연계하여 전반적인 안건을 원하는대로 통과시켜 나갈 수 있었다.그렇게나 싸워댔던 지조증징 법안은 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직후 통과되었으며,1899년(메이지32)에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 역시 통과되었다.여기서 말하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은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을 말하는 것인데,문관임용령은 정당 소속인의 내각 임용을 금지하는 법이었고, 문관분한령은 내각의 교체에도 국무대신과 관료들의 위치를 보전시켜주는 법이었으니,이는 제..
교토와 나라에는 성곽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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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전통시대에 수도라 함은 성곽과 궁궐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돋보인다.서울의 경우 한양도성과 5대궁,개성 역시도 개성부가 외성과 나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 안에 만월대가 있었다.중국의 경우에도 명과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은 이중으로 두꺼운 성벽이 둘러싼 형태 안에 자금성과 중남해가 위치해있었다.유럽의 경우 근대화 및 도시 확장으로 인해 이러한 면모가 퇴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빈의 호프부르크 왕궁,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로마와 프랑스의 주요 궁전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구시가지 내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일반적인 예시일 뿐 예외도 있다.바로 일본이다.이렇게 말을 하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는 과거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 성 자리이며,교토에는 니조성이, 오사카에는 오사카..
와이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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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행적이 성공 혹은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3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는 아군 하나 없이 내각을 구성했고, 결국 얼마 안가 사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정치 감각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그 이후의 행적이 과감하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권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번벌파와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는 민권파(혹은 민당파)로 나뉘었다.민권파는 대동단결운동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테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자..
청일전쟁 직후의 국제정세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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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8) 을미사변이 발생했고,아무리 조선을 쌩무시하던 일본이라지만 일단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둘 수는 없었다.미우라 고로가 귀국된 후 후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내정되었다.무츠 무네미츠의 측근이기도 했던 고무라였기에, 고무라가 조선에서 진행할 임무는 기존 대조선정책의 유지라고 볼 수 있겠다.하지만 얼마 안가 아관파천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조선정책은 큰 변곡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기에고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 내에서 일본이 그간 차지한 권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무라는 즉시 이에 대한 협상을 가졌고, 조선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하나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베베르 고무라 각서'이다. 동년 비슷..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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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
적군파 투쟁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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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전후 쇼와
1960년대 일본은 투쟁과 시위의 시대였다.그 모든 시작은 新미일안보조약의 체결 및 미일 안보체제의 연장이었다.1960년(쇼와35) 新미일안보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미일 안보체제에 반대하던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 그리고 주요 노조 및 운동권이 주도하여안보투쟁이 나가타초를 뒤덮었다.결국 신조약은 체결되어 미일 안보체제는 무기한 연장되었고, 그 대신 기시 노부스케 내각총리대신이 사임했다.그렇다고 이런 식의 투쟁과 데모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도쿄대학, 와세다대학, 메이지대학, 주오대학, 오사카대, 교토대 등등 주요 대학에서 학비 투쟁 등이 발생했고,이러한 시위는 좌익단체였던 전학련이 주도한 것이었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으로 국제공항의 설비 확대를 체감한 일본정부는지바현 나리타시 산리즈카 일대에 신 도쿄 국..
조슈 파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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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위 사진의 5인은 좌측부터엔도 긴스케, 노무라 야키치, 이토 슌스케(상단)이노우에 분타, 야마오 요조(하단) 조슈번에서 개국 직후 몰래 파견한 다섯명의 유학생이며 영국 상선회사와 연계해 런던대학(UCL)에서 수학한 인물들이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Choshu Five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학 결과는 어땠을까? 엔도 긴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조폐국장으로 일했다.1887년 조폐국장이 되어 1894년까지 일본의 화폐 사업의 핵심이었다고 보면 되겠다.설계자에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있었다면, 실무자는 엔도 긴스케였다. 노무라 야키치(이노우에 마사루)는 일본 철도 사업의 핵심으로 일했다.철도사업을 추진하고 그 노선을 결정하는 데에 그의 역할이 핵심적이었으며 도카이도 본선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그래..
삼국간섭과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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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물론 변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조선이 카를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와 교류하고, 이완용 등 친러파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있다지만외교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는 협상이 가능한 상대였기 때문이다.1894년(메이지27) 청일전쟁이 한참이던 상황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가 붕어했다.그리고 오쓰에서 칼에 맞았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오쓰 사건의 앙금이 남지는 않았기에 러일 양측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고,1896년(메이지29) 니콜라이 황태자 즉위식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즉위식 후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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