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츠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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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다이쇼
조슈삼걸의 시대대략 일년여의 시간 동안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세명의 인걸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 명을 달리했다.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조 사네토미를 제외하면, 소위 '유신의mtw31082.tistory.com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슈삼걸 중 한명이자 조슈삼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이기도 하다.초연주의와 번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외교와 내정면에서 활동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와 달리군사 분야, 특히 육군에 집중했다.육군의 초기 상층부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조슈번사들로 구성되었고,점차 주요 인물이 나이가 들면서 육군 내 야마가타의 정치적 입지는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 인물은 보신전쟁의 선봉장 중 한명이다.막말변혁의 주인공격인 인물이 이끄는 육군이었으니 ..
한일합방과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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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본격화되는 조선 침탈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mtw31082.tistory.com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의 체결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대조선정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대한제국은 외교권을 포함해 다양한 방면에서의 행정적 권한을 일본에게 이양해야만 했고이제 이를 기반으로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만이 한국 식민지화에 있어 남은 마지막 과정이었기 때문이다.다르게 말하면 이제 한국 지배를 위한 완료단계에 들어섰기에 일본은 이를 위한 적임자를 한국에 보내 마지막 과정을 일임시켰다.어쩌면 그간의 과정만큼 중요한 것이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도 아..
본격화되는 조선 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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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전쟁의 개전지로 선택되고 한반도 전역이 일본의 물자 보급로로 활용되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입었지만,의외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이는 당시 주요 항일 지식인이었던 이승만, 안중근 등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으며,많은 지식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응원한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이것은 단순히 더 지식인들이 친일 성향이었기에 나타는 현상은 아니었다.당시 한국에 반러감정이 팽배해있었고 서양열강으로부터 동아시아가 항전한다는 이미지가 있었기에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전쟁 이전의 러일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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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900년(메이지33)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려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견제하려 만주 점령을 시도했다.같은 맥락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 시도가 큰 위협으로 판단했고,결국 1901년(메이지34)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를 러시아로 파견해 러일협상을 추진했다.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까지 모스크바로 파견해 러일협상을 진행했으나열강이 보장하는 한국의 중립화따위는 배고픈 신흥 제국주의 열강에게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그리고 이토의 러일협상이 결렬된 후인 1902년(메이지35) 결국 1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1차 영일동맹의 체결은 곧 러일 간의 전쟁 구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부동항 확보라는 목표를 가지고 러시아는 만주, 한반도, 일본을 향해 남하했고,러시아 남하의 목표이자 대륙침략을 위해 한반..
입헌정우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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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그래도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헌정당(구 자유당계)과 연계하여 전반적인 안건을 원하는대로 통과시켜 나갈 수 있었다.그렇게나 싸워댔던 지조증징 법안은 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직후 통과되었으며,1899년(메이지32)에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 역시 통과되었다.여기서 말하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은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을 말하는 것인데,문관임용령은 정당 소속인의 내각 임용을 금지하는 법이었고, 문관분한령은 내각의 교체에도 국무대신과 관료들의 위치를 보전시켜주는 법이었으니,이는 제..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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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
조슈 파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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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위 사진의 5인은 좌측부터엔도 긴스케, 노무라 야키치, 이토 슌스케(상단)이노우에 분타, 야마오 요조(하단) 조슈번에서 개국 직후 몰래 파견한 다섯명의 유학생이며 영국 상선회사와 연계해 런던대학(UCL)에서 수학한 인물들이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Choshu Five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학 결과는 어땠을까? 엔도 긴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조폐국장으로 일했다.1887년 조폐국장이 되어 1894년까지 일본의 화폐 사업의 핵심이었다고 보면 되겠다.설계자에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있었다면, 실무자는 엔도 긴스케였다. 노무라 야키치(이노우에 마사루)는 일본 철도 사업의 핵심으로 일했다.철도사업을 추진하고 그 노선을 결정하는 데에 그의 역할이 핵심적이었으며 도카이도 본선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그래..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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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근데 일본은 싫대.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
헌법을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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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홋카이도 개척사와 메이지 14년의 정변홋카이도(北海道). 에도시대까지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린 곳으로, 아이누인의 땅이다.이곳이 일본의 영토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로,1599년(게이초4) 가키자키 요시히로가 지금mtw31082.tistory.com1882년(메이지15) 메이지 신정부는 헌법 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 이와쿠라 도모미는 독일과 일본의 정세가 흡사하다고 판단했고,독일 헌법을 모범으로 일본의 헌법을 제정한다는 방침을 설립했다.이러한 이유로 독일식 입헌군주제 도입의 선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1882년 독일로 파견되어1년여간 독일 헌법의 이론과 운용을 수학했고,1883년(메이지16) 귀국한 이토를 중심으로 헌법 제정을 위한 기관인 제도취조국이 설립되었다. ..
홋카이도 개척사와 메이지 14년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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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홋카이도(北海道). 에도시대까지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린 곳으로, 아이누인의 땅이다.이곳이 일본의 영토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로,1599년(게이초4) 가키자키 요시히로가 지금의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을 설치하고 성을 마쓰마에로 바꾸면서부터였다.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대비해 막부직할령이 되기도 했고,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대비해 홋카이도를 넘어 가라후토(사할린), 치시마(쿠릴열도)까지 탐험과 측량을 진행하기도 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일본영토였다기 보다는,일본의 권한 하에 있는 아이누인의 땅에 가까웠다.일본영토로 완전히 편입된 계기는 하코다테 전쟁으로,보신전쟁 말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에조 공화국을 설립했고, 이후 신정부군에게 항복하며 완전한 일본영토가 되었다.에조치가 아닌 고키시치도의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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