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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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일합방과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본격화되는 조선 침탈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mtw31082.tistory.com한일합방조약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만큼 뜨거운 것이 바로 합법성의 여부이다.즉,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한일합방조약의 체결 사실 자체는 법적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물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는 국제공법에 기반으로 한 국제법 인식이 있었을 뿐,조약 체결 등을 포함해 국제적 관습에 대한 법제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일합방조약의 법적 합당성을 의심해보도록 하겠다.의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법대를 나온 게 아..
하라 다카시 총리 피습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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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다이쇼
폭풍 속의 하라 내각하라 다카시. 일본의 19대 총리이며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함께 다이쇼시대 입헌정우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인물인데, 이유는 간단하다.原(하라)敬(다카시). 즉 이mtw31082.tistory.com그동안 쓴 글을 기반으로 보면, 하라 다카시 총리는 총리재임기 동안 그렇게 큰 활약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외정 면에서는 1차대전에 대한 정리와 중국 문제, 3.1운동 등의 임팩트가 강했고,내정 면에서도 정책에 대한 부분보다는 국가주의나 궁중모중대사건처럼 하라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 주목되곤 한다.다만 그렇다해서 하라가 아무 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다이쇼8) 하라 내각은 모든 일본인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선거를 도입하고자 했다...
한일합방과 제국주의 일본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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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본격화되는 조선 침탈시간을 잠시 돌려서 1904년(메이지37) 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잠시 언급해보자.대한제국은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1월 고종황제가 직접 중립국임을 선언했으나 무시당했고결국 인천항이 러일mtw31082.tistory.com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의 체결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대조선정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대한제국은 외교권을 포함해 다양한 방면에서의 행정적 권한을 일본에게 이양해야만 했고이제 이를 기반으로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만이 한국 식민지화에 있어 남은 마지막 과정이었기 때문이다.다르게 말하면 이제 한국 지배를 위한 완료단계에 들어섰기에 일본은 이를 위한 적임자를 한국에 보내 마지막 과정을 일임시켰다.어쩌면 그간의 과정만큼 중요한 것이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도 아..
의화단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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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잠시 중국이야기를 해보자.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기독교 포교가 허용되었고, 해안의 조계지에는 서양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아편의 폐해는 물론이고, 기독교 및 서양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반서방 감정이 고조되었고이는 청일전쟁의 패배와 양무운동의 실패로 중국다움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의화단이다. 의화단은 의화권이라는 무술을 연마하던 집단이며, 백련교의 일파라는 설도 있다.중국다움에 대한 고찰이 전통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변질되어 무술로 총칼을 막을 수 있다는 식으로 왜곡되었고의화단은 이에 호응하듯 중국 전역을 돌며 차력쇼로 스스로를 홍보하며 단원을 모아갔다.그런데 애초에 총칼을 어찌 막는가?백번 양보해 냉병기는 강력한 육체로 막는다고 치겠다. 하지만 강선이 도입된 시..
와이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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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모든 행적이 성공 혹은 성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3차 이토 내각에서 이토는 아군 하나 없이 내각을 구성했고, 결국 얼마 안가 사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정치 감각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그 이후의 행적이 과감하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자유민권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정치계는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번벌파와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는 민권파(혹은 민당파)로 나뉘었다.민권파는 대동단결운동 이후 이타가키 다이스테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자..
청일전쟁 직후의 국제정세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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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8) 을미사변이 발생했고,아무리 조선을 쌩무시하던 일본이라지만 일단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둘 수는 없었다.미우라 고로가 귀국된 후 후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내정되었다.무츠 무네미츠의 측근이기도 했던 고무라였기에, 고무라가 조선에서 진행할 임무는 기존 대조선정책의 유지라고 볼 수 있겠다.하지만 얼마 안가 아관파천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조선정책은 큰 변곡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기에고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 내에서 일본이 그간 차지한 권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고무라는 즉시 이에 대한 협상을 가졌고, 조선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하나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베베르 고무라 각서'이다. 동년 비슷..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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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
조슈 파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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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위 사진의 5인은 좌측부터엔도 긴스케, 노무라 야키치, 이토 슌스케(상단)이노우에 분타, 야마오 요조(하단) 조슈번에서 개국 직후 몰래 파견한 다섯명의 유학생이며 영국 상선회사와 연계해 런던대학(UCL)에서 수학한 인물들이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Choshu Five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유학 결과는 어땠을까? 엔도 긴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조폐국장으로 일했다.1887년 조폐국장이 되어 1894년까지 일본의 화폐 사업의 핵심이었다고 보면 되겠다.설계자에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있었다면, 실무자는 엔도 긴스케였다. 노무라 야키치(이노우에 마사루)는 일본 철도 사업의 핵심으로 일했다.철도사업을 추진하고 그 노선을 결정하는 데에 그의 역할이 핵심적이었으며 도카이도 본선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그래..
삼국간섭과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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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물론 변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조선이 카를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와 교류하고, 이완용 등 친러파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있다지만외교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는 협상이 가능한 상대였기 때문이다.1894년(메이지27) 청일전쟁이 한참이던 상황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가 붕어했다.그리고 오쓰에서 칼에 맞았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오쓰 사건의 앙금이 남지는 않았기에 러일 양측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고,1896년(메이지29) 니콜라이 황태자 즉위식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즉위식 후 러시..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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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근데 일본은 싫대.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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