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삼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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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략 일년여의 시간 동안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세명의 인걸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 명을 달리했다.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조 사네토미를 제외하면, 소위 '유신의 첫 세대'로 부를만한 정치 거물은 사라져버렸고,그 자리르 채운 것은 40대 초반, 30대 후반의 조슈 젊은 인사들이었다.그 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해준 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유신삼걸이 그랬듯, 중심이라 할만큼의 존재감을 보인 건 이토 혼자만이 아니었다.도사번 출신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도 있었고, 사가번 출신의 오쿠마 시게노부도 있었지만,어떨 때에는 이토와 손을 잡고, 어떤 때에는 이토와 경쟁하며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메이지 일본의 정권 핵심으로 그 존재감을 보여 준 세명..
공의여론과 서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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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사족과의 연계를 주장했기에, 낙향 이후 사족들의 불만에 호응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정한파들 중에는 이토 신페이처럼 적극적인 무력 저항을 추진한 사람도 있었고,사이고 다카모리처럼 배후에서 조용히 준비하던 사람도 있었지만모두가 무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뒤집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1874년(메이지7)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민선의원설립건백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후쿠이번사였던 유이 기미마사, 애국공당을 결성하기 전의 에토 신페이 등 신정부의 중역들이 참여했기에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선의원설립건백서의 원문은..
오쿠보 정권과 사족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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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유신삼걸사쓰마번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조슈번사인 기도 다카요시,위 3인을 뜻하는 말이다.대정봉환 직전까지 존황양이지사의 대표격으로 활동했고,메이지 신정부 초기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했다.이들의 장점은 바로 다재다능함이었고,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역시도 다재다능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구미순방파가 정권을 잡았고, 국내잔류파는 사직해 낙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구미순방파와 국내잔류파 간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견이 갈렸는데,정한론은 그 중 하나였고, 공의여론의 형태에 대해서도 양측은 이견이 갈렸다.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다이묘와 사족들도 정치에 참여시키려한 반면, 오쿠보는 현행 번사 중심의 체제를 원했다.결과적으로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의 의..
조선 서계 사건과 정한론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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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그렇기에 총 네가지 사설 무역로를 두었다. 사설인 이유는 막부가 아닌 번이 주도했기 때문이다.이를 네개의 입구(四つの口)라고 한다.그 네개의 입구는 다음과 같다.마쓰마에구치: 가라후토-에조치 방면(울치인 및 청의 연해주로의 교역)-마쓰마에번이 주도나가사키구치: 나가사키 방면(네덜란드 및 청과의 주인장 무역)-나가사키 봉행소가 주도사쓰마구치: 류큐 방면-사쓰마번이 주도그리고 마지막 네번째가 바로 쓰시마구치이다. 쓰시마방면이고 쓰시마번이 주도한 조선과의 무역을 뜻한다.이 네 방면의 무역을 제외한 무역은 전부 밀무역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국가 간 외교관계를 맺..
이와쿠라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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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멀기에 일본은 대규모의 사절단을 계획하게 되었다.조선이야기는 서계사건과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870년(메이지3) 메이지 신정부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특정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을 조직하였다.사절단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나오요시이하 생략 참고로 이때 동반해서 보낸 유학생들 멤버가 짱짱하다.나카에 조민, 단 다쿠마, 마키노 노부아키, 쓰다 우메코, 오토리 게이스케 등등이때 유학을 간 인사들은 이후 메이지시대의 주요 지식인 및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불평..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일본 내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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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안세이 5개국 조약안세이(安政)전국이 대지진으로 고통받고, 교토의 화재로 교토 고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며,흑선사건, 이에요시 쇼군의 죽음과 병약한 이에사다 쇼군의 즉위, 막부 재정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mtw31082.tistory.com안세이 5개국 조약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맺은 불평등조약으로,그 불평등성으로 인해 일본 내에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따라서 안세이 5개국 조약의 개정은 메이지 일본의 외교적 최우선 과제였고,이것이 실패할 경우 국내의 잔존한 문제가 심화됨을 넘어 일본의 식민지화까지 유발할 수 있었다.결론적으로 개정에 성공했기에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것이고, 누구는 이걸로 졸업논문을 썼다지만,일단 이와쿠라 사절단을 논하기 전에 왜, 어떻게 불평등했는지를 적어보..
메이지 유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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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에도성의 성문이 열리고 얼마 안되어 연호가 새롭게 바뀐다.새로운 연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메이지(明治)였고,겸사겸사 일세일원제가 도입되면서 사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을 도와준다.덴노, 쇼군 치하에 연호 대여섯개 쓰는 시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여기에 덤으로 1872년(메이지5) 그레고리력이 도입된다. 이제 날짜 이 중 체크 안해도 되는 거다. 1868년(메이지1) 메이지 덴노는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쿄 천도를 선언했다.에도성은 황거로 개량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외교관계를 맺은 주요 국가에 신정부의 수립 및 새로운 덴노의 즉위를 알렸고,이어 태정관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산조 사네토미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직위 상 최고직은 산조 사네토미가 차지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그 휘..
보신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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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현 일본 영토 중 3분의 2가 신정부에 가담했다.그리고 에도 막부마저도 정권 유지 및 저항을 포기하고 에도 성의 문을 열어버렸다.이제 남은 번과 군대에게 선택지는 버티고 저항할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둘 중 하나였다. 아이즈번과 나가오카번은 조슈와 사쓰마만큼은 아닐지라도 서양 무기와 전술 도입에 적극적인 번이었다.그리고 아이즈번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사생아 호시나 마사유키 가문의 영지로,가문의 기치 자체가 막부 수호인 곳이다.여기가 싸움 한번 없이 항복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다.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도호쿠 열번들이 아이즈번과 쇼나이번의 탄원을 해주자고 주장한 세라 쇼조가 천주되기도 했다.우선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등은 닛코..
보신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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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大政奉還)국정을 봉하여 조정에 돌려주었다해서 좌막파와 도막파의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되겠다.최종결정권자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무작정 존중하는 건 천주의 시대 일본에서 말이 되는 게 아니다.말이 되었으면 존황양이 따위 진작에 끝났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요시노부 쇼군의 앞으로아이즈번주이자 교토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번주이자 교토소사대를 총괄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고베 해군교습소의 설립자였던 가쓰 가이슈 등이 진언했고결국 요시노부 쇼군도 좌막파인사들의 뜻에 동참하게 되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1월, 아직 연호도 바뀌지 않은 무진년초사쓰마번이 장악한 조정에서 요시노부 쇼군의 영지와 내대신 직위를 반환하기로 결의했고,요시노부 쇼군은 이에 대한 항의로 오사카성에서 거병한다..
메이지 유신을 앞두고 쓰는 세계 정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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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메이지 유신을 앞두고 쓰는 세계 정세 1이제 보신전쟁을 시작으로 메이지시대를 논해야 하지만,앞으로 외교나 정치 방면에서 외국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기에흑선사건 이후의 세계정세를 가볍게 다루고자 한다. 미국미국은 일본을mtw31082.tistory.com서양은 여기로 이번엔 동아시아의 청과 조선을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청두차례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청 조정은 이미 그 여력을 상실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따라서 청은 개혁과 발전이 급했고, 이를 위해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공헌한 한족 관료들이 중용된다.이홍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61년 함풍제가 피신지인 열하에서 붕어하고, 서태후, 동태후, 공친왕 혁흔이 신유정변을 일으킨다.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은 전부 죽거나 실각했고, 그 빈자리를 두 태후와 공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