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성의 성문이 열리고 얼마 안되어 연호가 새롭게 바뀐다.
새로운 연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메이지(明治)였고,
겸사겸사 일세일원제가 도입되면서 사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을 도와준다.
덴노, 쇼군 치하에 연호 대여섯개 쓰는 시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여기에 덤으로 1872년(메이지5) 그레고리력이 도입된다. 이제 날짜 이 중 체크 안해도 되는 거다.
1868년(메이지1) 메이지 덴노는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쿄 천도를 선언했다.
막부의 중심이었던 에도성은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로 개량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외교관계를 맺은 주요 국가에 신정부의 수립 및 새로운 덴노의 즉위를 알렸고,
이어 태정관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산조 사네토미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
직위 상 최고직은 산조 사네토미가 차지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그 휘하에 있던 참의들이 주도했다.
참의에 오른 인물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고토 쇼지로 등등
이들은 전부 번사출신으로 상급 혹은 하급무사 출신이지 다이묘 출신이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면 다이묘와 지방사족을 중심으로 한 에도시대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가 건설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재무쪽에는 사쓰마번사인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히젠번사인 오쿠마 시게노부,
내무 쪽에는 조슈번사인 이토 히로부미,
외교 쪽에는 조슈번사인 이노우에 가오루, 아오키 슈조
이 당시에 중용된 것은 아니지만, 군사방면에는
사쓰마번사인 사이고 주도, 조슈번사인 오무라 마스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막부 중신인 가쓰 가이슈
등등이 발탁되었다.
이들이 단행해야 할 내정-외무 분야의 과제는 쌓이고 넘쳤지만, 그 부분은 후술하고
체제면에서의 개편 위조로 언급해보고자 한다.
1869년 메이지 신정부(이하 신정부)의 주도로 지방에서 자발적인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진행되었다.
대충 각 번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국가에 반환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걸 쉽게 '자발'이라고 해석하기는 이르다.
이후 편제를 개편하고 병부성을 설치해 기존의 고케닌/하타모토 체제를 혁파하고 국가 중심의 군대로 개편했다.
물론 그 안에는 사쓰마가 장악한 해군과, 조슈가 장악한 육군으로 나뉘어지기는 했는데
아직 그거 언급할 시대는 아니다.
같은 해 신정부는 소학교 설치 방침을 공표했다. 교육면에서도 개편이 시작된 것이었다.
1868년 조선 서계 사건이 발생했고,
요시다 쇼인의 영향으로 강경한 침략론을 주장한 기도 다카요시에 의해
대륙침략론이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조선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에조 공화국이 멸망한 이후 구로다 기요타카가 에조치의 관리를 맡았으며,
에조치를 홋카이도로 개칭함과 동시에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했다.
이를 넘어 1870년(메이지3) 가라후토 개척사까지 설치했고, 이는 향후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했다.
이 부분도 후술하겠다.
1871년(메이지4) 메이지 신정부는 번을 해체하고 국(国)이라는 단위를 폐지했으며,
그 대신 전국을 3부 73현으로 개편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지방의 독자적인 행정조직과 정책은 사라졌고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가 도입된 것이다.
동시에 신분해방령과 산발탈도령(폐도령)을 실시해 그간 존재한 사무라이 중심의 신분제도 혁파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분해방령은 노예해방 같은 게 아닌, 사무라이냐 아니냐에 따른 사회적 지위 차이를 해소시킨 것이다.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편제 개편에 신분해방령 및 폐도령까지,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지방 사족과 무사들, 즉 에도막부 개혁의 구제 목표였던 고케닌과 하타모토에게는 큰 타격을 입혔다.
모든 영지와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었으며, 그 동안의 직위나 권위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애초에 그들은 돈 벌 방법도 없었기에, 결국 에도 막부 때보다도 가난해지는 큰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고케닌과 하타모토 입장에서 모순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열린 새시대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히는
새로운 식의 모순으로 다가왔고, 당연히 그들은 정부의 이러한 대우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항의의 시작이 바로 폐도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지방 사족들의 불만과 이로 인해 파생될 불안요소를 신정부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부재한 정국에서 정무를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은
사족들을 달래고 사족들을 정치에 참여시켜 그 불만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당시 서구화 및 산업화를 두고 각 성이 행정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에,
각 성의 업무와 우선순위를 재정립해 행정을 개편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촉구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조선 문제로 사이고가 일을 크게 벌려놓은 상태라서 정국이 급하긴 했다.
그런데 이때 사이고는 몰랐을 것이다.
그의 친우 오쿠보는 사족에 협조한다는 사이고의 이러한 생각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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