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예 이노키 봄바예 이노키
BGM
안토니오 이노키. 본명은 이노키 간지(猪木寛至)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설립자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모든 무술을 집약시킨 것이 바로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트롱 스타일'의 아버지.
일본 격투기에서 그의 이름을 뺀다면 그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런 레전드 오브 레전드가 도대체 뭐가 아쉽다고 정치판에 뛰어든 것일까?
1989년(헤이세이1)
안토니오 이노키는 자신의 일가와 함께 '스포츠평화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비록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여전히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현역 선수이자 경영진이었는데,
왜 굳이 이 업무를 냅두고 정치로 향하냐는 것이다.
아마도 프로레슬링을 기반으로 한 전국적 유명세와,
프로레슬링과 격투기를 넘어 일본 최대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자신을 과신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노키는 이노키였다.
이노키가 세운 스포츠평화당은 1989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무려 한명의 당선자를 배출했고,
그 당선자는 가장 많은 기명 득표를 받은 안토니오 이노키였다.
게다가 참의원은 해산도 못한다. 당선되면 사고 치지 않는 한 6년 임기가 무조건 보장된다.
그렇게 일본의 전설은 나가타초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노키 간지 참의원 의원은 자신의 유명세와 참의원 의원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에 억류된 41명의 일본인을 구하러 직접 쿠웨이트에 날아가 경기를 치뤘으며,
그 경기로 억류된 41명을 모두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정치는 분명 돈이 많이 들텐데,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이노키가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하지만, 후원금과 본인 재산만으로는 힘들텐데 말이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엄청난 스타이고 훌륭한 레슬러였지만, 솔직히 훌륭한 비즈니스맨은 아니었다.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을 시작으로 이노키의 특집 결전은 애초에 전부 적자였다.
격투기 단체인 Pride를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시켰지만, 전부 큰 이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노키에게 그 책임과 적자를 모두 물었고, 결국 이노키는 회장이 아닌 평사원으로 강등당했다.
근데 그대로 신일본에서 이노키의 이름을 뺄 수는 없었다. 특히 그의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TV 아사히가 '이노키가 없는 신일본은 송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고,
그렇게 이노키는 심복들까지 데리고 회장에 복귀했다.
이노키가 회장직을 겸임했기에 신일본의 돈은 스포츠평화당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았고,
이 타이밍의 이노키의 여자문제와 금전문제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정치인 이노키 간지에 대한 인기는 급속도로 사그라들었고,
이대로면 1995년 예정된 이노키의 재선 도전 결과는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프로레슬링 단체 WCW가 이노키에게 접근해왔다.
소련이 개방될 때 그 장면에 펩시콜라가 우연히 끼어 들어가 노출되었고
이후 펩시콜라는 냉전의 종식과 소련의 개방으로 상징처럼 취급되어 판매량이 급증했다.
에릭 비숍은 이 포인트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WCW와 WWF(현WWE)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던 1990년대 초
에릭 비숍은 WWF를 무너트리기 위해 펩시의 떡상 포인트를 활용하려 했다.
당시 동구권 국가들은 대부분 개방이 되었기에, 1990년대 초에도 폐쇄적이었던 구 공산권 국가라고 하면,
쿠바는 절대 안되고, 에리트리아는 위험하며, 알바니아와 몰도바는 돈이 안된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 정권이 수립된지 얼마 안되었고,
김정일이 정권을 물려받았음에도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걸 전세계에 홍보하려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WCW의 니즈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헐크 호건이 안간다고 하고, 릭 플레어를 필두로 스타 선수들이 북한행을 결정했지만
릭 플레어로는 급이 안맞는다고 김정일이 헐크 호건급을 데려오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릭 플레어도 레전드야 뽀글아.
에릭 비숍은 겨우겨우 무하마드 알리를 섭외했고, 겸사겸사 외교로 지지율을 부활시키고자 한 이노키까지 합류시켰다.
조총련계 재일한국인 레전드 역도산의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를 북한에서 모를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WCW는 북한에서 호응 받을 수 있는 선역 이노키가 악역 미국인 릭 플레어를 꺾는 메인이벤트를 구상했고,
이 메인이벤트는 북한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이제 비디오만 팔리면 되는데, 이런 이미 냉전 개방의 효과는 거품이 꺼진지 오래였다.
결국 WCW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북한행은 적자만 심하게 낸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 방북은 WCW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고, 재정문제로 결국 WCW는 WWF에 인수합병되었다.
이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입장에서도 최악의 결과였다.
북한에서 만든 명경기?를 미국에서는 아무도 안보고, 일본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근데 오히려 이 WCW쇼 때문에 불법 방북이라고 일본에서 욕만 잔뜩 먹었다.
결국 1995년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스포츠평화당은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98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도 당선에 실패하자 안토니오 이노키는 프로레슬링과 정치인생을 모두 은퇴했고
이후 소식이 끊긴 스포츠평화당도 2006년 조용히 해산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2013년
안토니오 이노키가 일본유신회에 입당했고, 일본유신회 소속으로 참의원 통상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일본유신회는 당 홍보를 위해 이노키를 공천했고
18년만에 이노키는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참원선 자체가 인지도 원툴로 표 끌어다 모으는 게 효과가 좋아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참의원에 복귀한 이노키가 잊을만 하면 외국(특히 북한) 가서 뭘 하려하니 일본유신회는 이노키와 결별을 택했고,
결국 이노키는 무소속-창당-탈당을 반복하다 2019년 불출마하며 진짜 정계에서 은퇴했다.
참의원 2기 시절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면, 또 북한에 간 이노키는 김정은 정권의 실권자를 만나고 왔다.
그 회담에서 일본 자본의 원산투자와 납북 일본인의 귀환을 약속 받았고, 이노키는 이를 엄청난 외교적 성과라고 홍보했는데,
하필 이 실권자가 장성택이었다.
얼마 안가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처형당했고, 이노키는 혈세로 북한가서 뻘짓한 게 되어버렸다.
이후 이노키는 프로레슬링의 레전드로 여생을 살다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대한 횡령 혐의로 나락 코 앞까지 갔었고,
2022년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본 정치 > 헤이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루히토 황태자비 문제 (0) | 2024.09.29 |
---|---|
전설의 정당 일본신당-6 (0) | 2024.09.11 |
전설의 정당 일본신당-5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