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메이지33)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려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견제하려 만주 점령을 시도했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 시도가 큰 위협으로 판단했고,
결국 1901년(메이지34)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를 러시아로 파견해 러일협상을 추진했다.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까지 모스크바로 파견해 러일협상을 진행했으나
열강이 보장하는 한국의 중립화따위는 배고픈 신흥 제국주의 열강에게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토의 러일협상이 결렬된 후인 1902년(메이지35) 결국 1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1차 영일동맹의 체결은 곧 러일 간의 전쟁 구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부동항 확보라는 목표를 가지고 러시아는 만주, 한반도, 일본을 향해 남하했고,
러시아 남하의 목표이자 대륙침략을 위해 한반도와 만주를 원한 일본이었기에
이 이후 러일 양국 간의 외교 활동은 전쟁을 막거나 연기시키기 위함이 아닌, 빌미를 찾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1903년(메이지36) 6월 주러 일본공사 구리노 신이치로는 러시아에 6개조 협상안을 제시했다.
영일동맹 이전의 중립화론과 달리, 이번 협상안의 내용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한국과 만주에 대해 러일 양국은 서로의 특수한 이익을 인정하는다는 내용이었지만,
일본이 제시한 내용 속 러시아의 이권은 상당히 축소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가지는 모든 이익을 인정하지만, 일본이 러시아에게 인정해주는 이익은 철도 경영에 한정되었다.
같은해 11월 러시아는 북위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는 교섭안을 일본에 제시했다.
당연히 일본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북위 39도선 이면 평양 바로 위이다. 이걸 용납한다는 건 한국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남의 나라 땅가지고 지들이 왜 선을 긋나 참
이후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만주 국경에 50km의 중립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이정도면 구체적인 제시안은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그냥 너만 만주, 혹은 한국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전쟁을 했을 때 일본의 승리 가능성이었다.
당시 정국을 살펴본 결과 일본은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판단했고
그렇기에 당장의 전쟁 준비가 미흡하다고 보았다.
1904년(메이지37) 1월 각의는 러일전쟁 개전을 결의했고, 귀족원은 무력으로 일거에 만주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했으며,
여론은 강경하게 러일 개전을 강요했다.
반전론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싸우면 이긴다는 광기에 휩싸인 일본에서 그런 건 의미없었다.
1904년 2월 4일 어전회의에서 러일전쟁 개전이 통과되었고,
나흘 후인 2월 8일 대한제국 인천항에서 일본군함에 의해 러시아군함이 포격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식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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