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몇대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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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 마레스케와 도고 헤이하치로
러일전재의 성과로 인해 '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라고 불렸고, 육해군의 알력싸움을 감안하면 라이벌 구도가 예상되지만
사실 그런 건 딱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을 굳이 꼬집어 다루는 이유는, 이 둘만큼 당시의 일본 육해군을 설명해주는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노기 마레스케는 조슈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1849년생이다.
요시다 쇼인이 죽고 쇼카손주쿠에 입학해 기도 다카요시의 먼 후배이자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의 직속 후배로 평가 받았다.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를 따라 기헤이타이에 들어갔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부대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러니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따라 보신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초대 육군경인 야마가타 밑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러일전쟁에서는 뤼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 유명하다.
뤼순 공방전에서의 수많은 사상자로 인해 그를 향한 비난 여론이 컸지만,
사실 뤼순 공방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원로들의 압박으로 무리한 감도 없지 않으며
무엇보다 노기 본인도 러일전쟁에서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노기는 대만총독(3대)을 역임했으며, 뤼순 공방전에서 발생한 사상자들에게 큰 책임감을 느껴 할족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의 명령으로 할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전역했다.
전역 이후에는 가쿠슈인에서 황태자(다이쇼 덴노)를 교육했으며, 메이지 덴노의 붕어 소식이 들리자 할복해 생을 마감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사쓰마번 가신 가문 출신으로 1848년생이다. 노기보다는 한 살이 많다.
어린 시절에는 반항아 기질이 심했다고 전해지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대포를 다루고 제작하는 것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했고, 사쓰에이 전쟁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의 지원 하에 영국으로 유학갔다.
영국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으나, 일본의 생존을 위해서는 강한 해군력이 필수라 판단해 귀국 이후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
이때 운이 좋았는데, 귀국길 도중 서남전쟁과 사이고 다카모리의 자결 소식을 들었으며
실제로 도고의 형은 서남전쟁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일본 해군 GOAT가 내전에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도고 역시 서남전쟁의 결과를 귀국길에서 듣고 자신이 일본에 남았으면 사이고공 따라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이후 사이고 주도 라인을 탄 건지 빠르게 승진했으며 청일전쟁에서는 웨이하이 전투에 참여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다시 한번 승진해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었으며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일본 해군 GOAT로 추앙받았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역 이후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으며, 정치에 군인이 관여하는 형국을 꼬집기도 했으나
막상 해군을 개선하려 하면 군인정신 강조하며 방해하기도 했다.
근데 일본 해군 GOAT가 하지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일본 해군의 복지는 메이지시대나 2차대전이나 동일했다.
노기의 할복 이후에는 노기의 뒤를 이어 황태자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1934년 병으로 사망했다.
노기와 도고는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쓰마'라는 형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막말부터 일본이 애지중지 키워온 육해군의 대표적인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조슈번과 사쓰마번이라는 출신과 라인으로 지원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이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능력보다는 출신으로, 그리고 라인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정치인은 배출하지만 유능한 지휘관을 배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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