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
그렇기에 총 네가지 사설 무역로를 두었다. 사설인 이유는 막부가 아닌 번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를 네개의 입구(四つの口)라고 한다.
그 네개의 입구는 다음과 같다.
마쓰마에구치: 가라후토-에조치 방면(울치인 및 청의 연해주로의 교역)-마쓰마에번이 주도
나가사키구치: 나가사키 방면(네덜란드 및 청과의 주인장 무역)-나가사키 봉행소가 주도
사쓰마구치: 류큐 방면-사쓰마번이 주도
그리고 가장 오래되었고 중요했던 네번째가 바로 쓰시마구치이다. 쓰시마방면이고 쓰시마번이 주도한 조선과의 무역을 뜻한다.
이 네 방면의 무역을 제외한 무역은 전부 밀무역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국가 간 외교관계를 맺고 평등하게 교류한 것은 조선이 유일했다. (류큐는 반식민지)
비록 쓰시마번의 중개를 거쳐 문서의 서식과 단어 선택이 조정되었다고 하나
양국 간에는 외형적으로는 분명 동등한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출범했고, 이 사실을 담은 사절단은 당연히 조선에 가장 먼저 당도했다. 가까우니 말이다.
문제는 이 사절단이 쓰시마번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간 쓰시마번을 거치면서 양국의 자존심 넘치는 단어들이 개정되어왔는데,
이번에 조선으로 보낸 서계에는 그런 내용이 조금도 개정되지않았다.
예를 들어 천황이라던가, 칙서라던가, 조선이 내린 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던가 이런 거 말이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서계에 불쾌감을 표했고, 일본의 서계를 그대로 반송시켰다.

아직 보신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에도의 신정부는 이 문제로 크게 분노했다.
존황양이론을 기반한 정부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큰 불쾌감을 표했고,
심지어 전쟁이야기까지 나왔다.
대충 조선은 발전이 더딘 약소국이니 나라의 군대를 총동원하면 가능할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말했듯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하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약소국을 점령해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업적 중 하나는 조선 출병(임진왜란)이다.
조선은 원래 임나일본부가 세워져있던 일본땅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한 인물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자 친우였던
기도 다카요시였다.
그리고 기도가 아니라도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정한론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대륙침략론이 채택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분명했다.
누군가는 소극적으로 주장했고, 누군가는 기도처럼 적극적으로 조선 정벌을 주장했지만
그게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고 있다.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이전 정한론자의 구분은 자료가 없어 불가능하다.
기도 다카요시만 자료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 정한론자로 요시다 쇼인과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명한데,
이 당시 사이고가 정한론에 대해 강경했는지, 온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등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당시 정황을 감안하면 강경이냐 온건이냐만 구분이 힘들뿐, 이들 전부가 정한론에는 동감하며 호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때는 일본이 조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서양에도 사절을 보내야 하고, 조약개정과 산업발전 투자를 준비해야 하며,
홋카이도와 가라후토에 개척사를 설치해야하고 향후 류큐에 대해서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판적봉환, 폐번치현, 후술할 지조재정조례와 사족 문제까지 다룰 게 너무 많았다.

1870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방하며 신정부 참의 주요 인사들의 공백이 발생했고,
정무는 일본에 잔류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토 신페이, 산조 사네토미가 주도했다.
물론 저 중에서 수장 역할을 맡은 것은 사이고였다.
국내잔류파는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 투트랙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우선 조선과의 대화는 지속했다. 서계를 수정하고 사절단의 귀국을 막았으나
결국 1872년(메이지5) 1월 조선으로 향한 사절단은 결국 귀국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청과의 외교관계를 추진했다. 참고로 주인장 무역은 상인 간의 관계였지 국가간 교류는 아니었다.
1871년 청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청과 일본은 동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 부분은 조일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데,
조선은 명목상 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는 명목상의 제후국으로,
청과 동등한 위치의 일본은 조선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했다고 주장할 근거를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일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홍장이 말했듯, 조선은 명목상 제후국이나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이를 어찌 볼 것인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런 건 지금 주제에서 많이 넘어가고, 길고 복잡한 내용이니 설명에서 제외하도록 하겠다.
1872년 일본 외무성이 조선의 왜관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조정은 이 이후 왜관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고, 일본 외무성의 관리들은 이를 기반으로 정한론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직접 조선으로 가 흥선대원군과 담판을 지으려고 했으며,
만일 자신에게 위해가 가해지거나 자신과의 담판으로 조일관계가 결렬될 경우, 이를 전쟁의 명분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들리자 이와쿠라 사절단은 급히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순방파와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국내잔류파는 조선 정벌에 대해 크게 이견이 갈렸다.
분명 출발 전에는 강경하게 정한론을 주장한 기도 다카요시도 정한론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오쿠보 역시 러시아와의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나서 조선 문제를 다시 다루자고 주장했다.
1873년(메이지6) 10월 15일
각의에서 국내잔류파의 강경한 조선 정벌론과 오쿠보의 온건론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조선에 사절을 보내자고 결의했고,
그러자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는 산조 사네토미에게 이를 취소하라고 강요했고,
결국 산조는 병을 이유로(실제로 이와쿠라의 강요로 정신착란을 앓았다고 함) 사직함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사절을 취소했다.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태정대신 대리에 오르자 정권은 갑작스레 구미순방파에게 기울었고,
이와쿠라는 조선 사절 파견 불가의견을 상주해 메이지 덴노의 허가를 받아냈다.
일주일 사이에 국내잔류파는 정치적 실권과 명분이 유명무실해졌다.
이대로 버텨봤자 의미도 명분도 없었기에,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직뿐이었다.
국내잔류파 중 대장성에서 활약한 마쓰카타 마사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구미순방파 귀국 직후 기도와 오쿠마에게 붙은 이노우에 가오루를 제외하면
국내잔류파 정원이 사임하게 되었다.
이를 '정한론 정변' 혹은 이 정변이 일어난 해에서 이름을 따와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한다.
정권은 오쿠보 도시미치가 주도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정권을 '오쿠보 정권'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적을 일이 있으면 또 적겠지만, 정한론 정변으로 정한론이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온건하게 전환했을 뿐 조선 정벌과 대륙침략의 의지는 유지되었다.
1874년(메이지7)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식이 있는 모리시마 시게루를 조선으로 보내 정보를 캤다.
사이고와 동일한 수준의 강경론자였던 모리시마의 정보를 기반으로 일본은 조선 공격을 준비했고
1875년(메이지8) 강화도에 운요호(雲揚号)를 포함 세척의 군함을 파견했다.
연안 측량을 핑계로 강화도에 접근하자 강화도 주둔군의 반발을 받았고, 그 즉시 강화도를 포격했다.
이 직후 영종도에 상륙해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이후 부산 앞바다에 함대를 보내 조선에 항의했다.
1876년(메이지9) 대충 정국이 안정된 일본은 조선의 강화도로 이동해 강압적인 자세로 교섭에 응했고,
'조일수호조규', 우리에게는 '강화도조약'으로 익숙한 조약을 체결했다.
연안 측량에 불안해하고 함대의 위협에 개국해야했던 일본은 32년만에 타국을 강제 개국시키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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