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삼걸
사쓰마번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번사인 기도 다카요시,
위 3인을 뜻하는 말이다.
대정봉환 직전까지 존황양이지사의 대표격으로 활동했고,
메이지 신정부 초기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했다.
이들의 장점은 바로 다재다능함이었고,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역시도 다재다능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구미순방파가 정권을 잡았고, 국내잔류파는 사직해 낙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구미순방파와 국내잔류파 간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견이 갈렸는데,
정한론은 그 중 하나였고, 공의여론의 형태에 대해서도 양측은 이견이 갈렸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다이묘와 사족들도 정치에 참여시키려한 반면, 오쿠보는 현행 번사 중심의 체제를 원했다.
결과적으로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의 의견이 채택된 것이었다.
한가지 궁금증이 있을 수 있겠다.
에도막부는 신판, 후다이를 중심으로 다이묘들이 정무를 주도했는데,
메이지 유신 직후 정무를 주도하는 유신 삼걸은 번사 출신, 산조 사네토미와 이와쿠라 도모미는 공가 인사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다이묘들은 어디로 갔을까?
판적봉환으로 그들의 재산은 전부 국가에 환속당했으며, 폐번치현으로 모든 권한을 잃었다.
이러한 조치는 다이묘에 한정된 것이 아닌, 상급무사인 고케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나마 돈이 많은 번은 신정부 주요 인사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자녀를 유학길에 보내 나름 부활의 여지가 있었지만,
그게 가능한 사무라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편의상 이러한 조치로 몰락한 다이묘와 고케닌을 '사족'이라 부르고자 한다.
1873년(메이지6) 지조개정조례가 공포되었다.
토지소유권을 확립하여 토지소유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세수입을 늘리는 전형적인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세수입을 늘리는 게 핵심이었기에
대장성에서 신정부의 재정정책을 주도하던 마쓰카타 마사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의 의견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증세정책이 불러올 당연한 반발을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몰락한 사족들뿐 아니라 농민들도 이러한 신정부의 정책에 항의했고, 지조개정 반대집회가 발생하기도 하는 와중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낙향했다.
사쓰마로 귀환한 사이고 다카모리, 도사로 귀환한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 사가로 귀환한 이토 신페이 등
이들은 대정봉환의 임무를 완수한 그 지역의 자랑이자 유명인사였다.
따라서 비록 도쿄에서 멀어졌다해도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들은 일본 최초의 야당격인 '정한파'가 되었다.
낙향한 잔류파와 사족들은 매사에서 신정부에 비판적이었다.
정한론 논쟁으로 낙향한 인사들이니 온건한 신정부의 대외정책을 하나하나 꼬집었고,
마침 그 타이밍에 표류한 류큐인이 대만 원주민에게 학살당하는 모란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권이 뒤집히니 신정부는 대만을 공격했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오지 못하면 대만을 점령하지 못한 신정부는 역적이 될 뻔했다.
운요호 사건도 비슷한 연유로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운요호 사건를 추진하고 실행한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야당격이라 하더라도 재야인사일 뿐, 정한파에게 남은 정치적 기반은 없는 상태였다.
정한파는 낙향한 후 모두 고향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일종의 정치단체를 결집했는데,
1874년 1월 전 사법경 에토 신페이가 사가현에서 조직한 애국공당이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정당보다는 단체에 조금 더 가까운 성격이었다.
게다가 수차례 천주와 대정봉환 토막전쟁인 보신전쟁을 거친지 10년도 안되었다.
그리고 위 사족들은 원래 무사였고, 불만 표출의 일환으로 폐도령도 안지키고 있었다.
신정부라고 토벌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1974년 2월 초 애국공당은 사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사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최초의 사족 반란이며, 신정부 중역인 이토 신페이가 가담했다는 건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연하게 실패했고, 에토 신페이는 수배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해 정한파 사족에 의해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록 이와쿠라 도모미가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이 보여주는 단적인 사실이 있었다.
천주는 아직 존재한다.
공의여론(公意輿論)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의견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의견(공의)을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막부 토벌의 명분이자 원인 중 하나였지만, 막부 붕괴 후의 신정부는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말처럼 가능하기는 쉽지 않다만, 사족들의 의견은 신정부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었다.
1876년 질록처분이 시행된다. 신정부가 사족에게 의무처럼 제공하던 녹봉도 폐지된 것이었다.
판적봉환, 폐번치현, 지조개정, 질록처분. 네 차례의 차별대우로 분노한 사족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푸렌의 난, 하기의 난, 아키즈키의 난
그리고 하기의 난에 참여하려 이동하던 무사들이 도쿄에서 경찰에 적발되자 경찰을 베고 도망간 시안바시 사건까지,
이대로면 사족의 낭인화, 혹은 이를 넘어 사족 기반의 새로운 반정부파가 구성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해도 사족의 중심이 되어줄 인물이 있기는 할까?
있었다.
구마모토, 미야자키, 가고시마, 어쩌면 나가사키까지도,
서남의 사족들은 이미 사쓰마의 아이돌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접근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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