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여론과 서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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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사족과의 연계를 주장했기에, 낙향 이후 사족들의 불만에 호응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정한파들 중에는 이토 신페이처럼 적극적인 무력 저항을 추진한 사람도 있었고,사이고 다카모리처럼 배후에서 조용히 준비하던 사람도 있었지만모두가 무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뒤집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1874년(메이지7)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민선의원설립건백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후쿠이번사였던 유이 기미마사, 애국공당을 결성하기 전의 에토 신페이 등 신정부의 중역들이 참여했기에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선의원설립건백서의 원문은..
오쿠보 정권과 사족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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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유신삼걸사쓰마번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조슈번사인 기도 다카요시,위 3인을 뜻하는 말이다.대정봉환 직전까지 존황양이지사의 대표격으로 활동했고,메이지 신정부 초기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했다.이들의 장점은 바로 다재다능함이었고,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역시도 다재다능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구미순방파가 정권을 잡았고, 국내잔류파는 사직해 낙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구미순방파와 국내잔류파 간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견이 갈렸는데,정한론은 그 중 하나였고, 공의여론의 형태에 대해서도 양측은 이견이 갈렸다.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다이묘와 사족들도 정치에 참여시키려한 반면, 오쿠보는 현행 번사 중심의 체제를 원했다.결과적으로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의 의..
조선 서계 사건과 정한론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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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그렇기에 총 네가지 사설 무역로를 두었다. 사설인 이유는 막부가 아닌 번이 주도했기 때문이다.이를 네개의 입구(四つの口)라고 한다.그 네개의 입구는 다음과 같다.마쓰마에구치: 가라후토-에조치 방면(울치인 및 청의 연해주로의 교역)-마쓰마에번이 주도나가사키구치: 나가사키 방면(네덜란드 및 청과의 주인장 무역)-나가사키 봉행소가 주도사쓰마구치: 류큐 방면-사쓰마번이 주도그리고 가장 오래되었고 중요했던 네번째가 바로 쓰시마구치이다. 쓰시마방면이고 쓰시마번이 주도한 조선과의 무역을 뜻한다.이 네 방면의 무역을 제외한 무역은 전부 밀무역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국가..
메이지 유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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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에도성의 성문이 열리고 얼마 안되어 연호가 새롭게 바뀐다.새로운 연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메이지(明治)였고,겸사겸사 일세일원제가 도입되면서 사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을 도와준다.덴노, 쇼군 치하에 연호 대여섯개 쓰는 시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여기에 덤으로 1872년(메이지5) 그레고리력이 도입된다. 이제 날짜 이 중 체크 안해도 되는 거다. 1868년(메이지1) 메이지 덴노는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쿄 천도를 선언했다.막부의 중심이었던 에도성은 덴노가 거주하는 황거로 개량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외교관계를 맺은 주요 국가에 신정부의 수립 및 새로운 덴노의 즉위를 알렸고,이어 태정관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산조 사네토미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직위 상 최고직은 산조 사네토미가..
보신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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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大政奉還)국정을 봉하여 조정에 돌려주었다해서 좌막파와 도막파의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되겠다.최종결정권자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무작정 존중하는 건 천주의 시대 일본에서 말이 되는 게 아니다.말이 되었으면 존황양이 따위 진작에 끝났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요시노부 쇼군의 앞으로아이즈번주이자 교토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번주이자 교토소사대를 총괄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고베 해군교습소의 설립자였던 가쓰 가이슈 등이 진언했고결국 요시노부 쇼군도 좌막파인사들의 뜻에 동참하게 되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1월, 아직 연호도 바뀌지 않은 무진년초사쓰마번이 장악한 조정에서 요시노부 쇼군의 영지와 내대신 직위를 반환하기로 결의했고,요시노부 쇼군은 이에 대한 항의로 오사카성에서 거병한다..
사카모토 료마와 삿쵸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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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막파에 비교했을 때 도막파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중심을 잡아줄 인물의 부재였다.좌막파에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아이즈번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막부와 조정을 중개하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그 누구보다 막부 수호의 의지는 강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이 있었던 반면,도막파는 안세이 대옥과 덴구토의 난으로 미토번이 좌막파로 전향했고,난벽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번은 공무합체론의 선봉처럼 활동했다.도사번은 번 내 여론이 좌막과 도막으로 양분되어 이에 따른 혼란도 있었고,조슈번은 결국 조정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도막파의 승리로 이어지기에도막파의 중심 역할을 해준 그 인물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잠시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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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따라 시간 순서가 왔다갔다 하는 개판인 분큐와 겐지 연간을 지나드디어 일세일원제 이전 마지막 연호인 게이오에 들어섰다.남은 건 삿쵸동맹과 사쓰도맹약, 2차 조슈 정벌, 삿쵸는 영국-막부는 프랑스와 손을 잡는 정세,그리고 대정봉환에 대한 설명뿐이다.그 다음부터는 이제 메이지이다. 이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으로 줄곧 다뤄야하지만 설명이 미흡했던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여기 언급되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와 대정봉환을 언급함에 있어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우선 사쓰마이다.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사쓰마번사로 막말 사쓰마 번정을 관할한 존황양이파 인사이다.존왕양이파이기에 유배도 다니고 실각도 하고 고생했지만그가 없이 사쓰마번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사쓰마번의 중신이었기에 사쓰마번과 관련된 주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공무합체론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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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돌려 분큐 연간으로 돌아가보자.조슈는 조슈대로, 사쓰마는 사쓰마대로 꼬장을 부리고 있고,젊은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자기 손으로 부리려 하고 있고,젊은 이에모치 쇼군은 조정을 자신과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쓰고 있다.그 와중에 천주사건은 끊이지 않고, 조정은 좌막파와 도막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중신으로 일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개하던 인물이 누구였냐?바로 쇼군 후계자로도 언급되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이다.1862년(분큐2) 고메이 덴노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부를 이용해 전쟁할 생각뿐이었으며,이에 대해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는 큰 불만을 가졌다.결국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토시 긴사토는 양위를 건백했고,이건 당연히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막말의 사쓰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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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薩摩). 에도에서 가장 먼 번으로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를 의미한다.이 지역의 다이묘 가문은 시마즈(島津)이며가마쿠라 막부때 휴우가(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쓰마, 오스미 제도를 관할하는 슈고에 임명되어에도시대까지 사쓰마번주를 유지했다. 전국시대 말에는 다른 다이묘 가문은 형제끼리 싸우고 부자 간에 하극상이 일어나는 개판인 와중에도시마즈 가문은 똑똑한 아들 넷이 사이도 좋고 능력도 좋아,이를 기반으로 규슈 남부 전 지역을 넘어 규슈의 패자를 넘보기도 했다.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입하면서 규슈 통일에 실패했고, 결국 도요토미에게 항복하였다.임진왜란의 노량해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차례의 전진철수를 감행한시마즈 요시히로가 바로 대표적인 사쓰마번주라고 할 수 있다. 전진철수로 인해 부상을 입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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