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서 조조는 여백사를 죽인 후 진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
이를 증명하는 반전교사인양, 우리나라에는 세상이 저버린 학자가 한명 있다.
아니 '있었다'
무함마드 깐수
레바논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레바논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인물이다.
자료조사차 한국에 방문했다가 그대로 한국에서 정착했으며,
단국대학교에서 '신라와 아랍, 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단국대학교에 초빈교수에 임명되었고, 동서교류와 실크로드에 대해 한국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1996년 체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수일
연변 출신 조선족으로 베이징대학교 아랍어학과를 졸업했다.
북한으로 이동한 후 외교 방면에서 활동했으며, 그 덕에 다양한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이 게다가 외모까지 이국적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 북한은 정수일을 남파간첩으로 보냈던 것이었다.
무함마드 깐수는 이를 숨기기 위한 가명이었고, 필리핀 출신인 점과 레바논의 대학을 졸업한 것 등은 전부 조작된 거짓이었다.
실제로 정수일은 무함마드 깐수 교수로 활동하며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고,
연구 활동과 더불어 북한에 한국의 정보를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단국대학교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정수일의 휘하에 있던 대학원생은 순식간에 지도교수가 사라진 '간첩의 제자'가 되었고,
단국대학교도 일단 부랴부랴 무함마드 깐수의 박사학위를 취소시켰다.
그렇게 정수일은 동서교류의 최고권위자라는 명예를 모두 잃었고, 국가보안법에 따라 사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수일은 그냥 간첩이라기엔 아쉽고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정수일은 동서교류라는 분야에 있어 학계에 기여한 것은 상당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이는 영어와 불어에 이은 세번째 완역이었다.
처용이 아랍인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고, 통일신라와 이슬람 상인의 교류에 대해 정수일만큼의 연구 성과를 보인 사람이 없었다.
즉, 다른 건 간첩짓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 해도, 실크로드사와 동서교류에 대한 권위만큼은 진실되었던 것이다.
가명인 무함마드 깐수의 깐수도, 실크로드 무역로에서 중요한 위치였던 중국 간쑤성에서 따온 것일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과연 이 인물이 간첩짓해서 북한에 넘긴 정보가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국정원(당시는 안기부)의 조사에 따르면 정수일이 넘긴 정보 중 그나마 쓸만한 건 NL계열 인사의 활동 정도이며,
남한의 정세나 주요 인사 정보와 같이 굳이 정수일이 아니여도 구할 정보를 제외한다면
정수일이 제공한 주요 정보는 정수일이 연구한 학술적인 자료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즉, 정수일은 애초에 쓸만한 간첩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2000년, 한국에서 결혼한 후처의 설득으로 결국 정수일은 남한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8.15 특사로 풀려났으며 2003년 학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정수일이 무함마드 깐수로 이룩한 모든 학술적 권위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단국대는 끝까지 박사학위를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애초에 석사 학위가 없는 정수일이었기에 당연한 절차였을지 모르겠다.
학계로 복귀한 후 정수일은 본명으로 활동하며 실크로드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오랜 기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했다.
실제로 찾아보면 그의 논문은 꽤 재미있는 주제가 많으며, 그의 연구는 교과서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권위와 명예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기는 했음에도
그의 권위를 인정시킬 직책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전부였다.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권위가 이렇게 된 과정이 이레귤러이기 때문이다.
정수일은 베이징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했을 뿐, 정석적인 과정을 따라 성장한 학자는 아니었다.
물론 외교계에서 활동하고 평양외국어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는 등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가 단국대에 도달한 이유부터가 간첩이기 때문 아니었는가.
다만 그렇다 하여 정수일의 연구 성과와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권위의 근간이 된, 11개국어 구사자이자 한국 최초이자 유일의 동서교류사 전문가라는 점은
정말로 이 사람이 간첩으로 낭비되어야 할 인물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아무리 역사에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라서 정수일이 학자로의 탄탄대로를 걸었다면,
김일성의 통역도 했던 그가 겨우 남파간첩따위로 소모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정수일이 연변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간첩혐의로 감옥에 다녀왔음에도 학계에서 지우기 힘든 그의 발자취가 더더욱 선명해졌음은 분명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위에서, 북쪽에서 태어났다면
상상만해도 끔찍하지만, 그 끔찍한 가정의 설명례가 된다는 것만으로,
그저 남북분단이라는 비극과 그 시대가 낭비시킨 천재 정수일이 안타까워질 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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