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과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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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물론 변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조선이 카를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와 교류하고, 이완용 등 친러파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있다지만외교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는 협상이 가능한 상대였기 때문이다.1894년(메이지27) 청일전쟁이 한참이던 상황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가 붕어했다.그리고 오쓰에서 칼에 맞았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오쓰 사건의 앙금이 남지는 않았기에 러일 양측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고,1896년(메이지29) 니콜라이 황태자 즉위식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즉위식 후 러시..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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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근데 일본은 싫대.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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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풍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대로 상륙해 성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중인 청군을 격퇴했다.이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평양성으로 향한 청군을, 남으로는 전라도의 동학군을 상대했으며,우금치에서 동학군은 궤멸, 평양성 전투도 조선 관군이 암묵적으로 청을 지원했음에도 일본이 승리했다.전장은 요동으로 넘어갔으며, 웨이하이 전투에서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전멸했다.대만과 펑후열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우장 개항장이 함락되었고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해 북경을 향해 진군하자청은 주력군이 전멸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고,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과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이 종전협상을 거부하자이홍장이 노신을 끌고 이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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