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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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전후 쇼와
오쿠보 도시미치. 유신삼걸 중 한명이며 메이지 신정부의 초기 정국을 관할한 사람이다.슬하에 8남1녀(정실 사이에서는 4남1녀)를 두었으며, 1878년 기오이자카에서 암살당한 후 그의 가문은 장남인 도시나카가 이었지만,이후 오쿠보 가문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정치인이 나오지는 않았다.대신 마키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 마키노 노부아키의 경우여러 내각에서 문부대신, 외무대신, 농상무대신을 역임하며일본근대사에서 언급해야할 이름이 되었다. 마키노 노부아키의 슬하에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녀 유키코가 외교관인 요시다 시게루와 결혼했다.요시다 시게루는 전전에는 영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었으며,전후의 신 체제를 구축한 총리이자 현 일본 보수의 아버지라 부를만한 인물이다.요시다..
공의여론과 서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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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사족과의 연계를 주장했기에, 낙향 이후 사족들의 불만에 호응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정한파들 중에는 이토 신페이처럼 적극적인 무력 저항을 추진한 사람도 있었고,사이고 다카모리처럼 배후에서 조용히 준비하던 사람도 있었지만모두가 무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뒤집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1874년(메이지7)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민선의원설립건백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후쿠이번사였던 유이 기미마사, 애국공당을 결성하기 전의 에토 신페이 등 신정부의 중역들이 참여했기에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선의원설립건백서의 원문은..
오쿠보 정권과 사족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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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유신삼걸사쓰마번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조슈번사인 기도 다카요시,위 3인을 뜻하는 말이다.대정봉환 직전까지 존황양이지사의 대표격으로 활동했고,메이지 신정부 초기의 내정, 외교, 군사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했다.이들의 장점은 바로 다재다능함이었고,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역시도 다재다능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와 구미순방파가 정권을 잡았고, 국내잔류파는 사직해 낙향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구미순방파와 국내잔류파 간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견이 갈렸는데,정한론은 그 중 하나였고, 공의여론의 형태에 대해서도 양측은 이견이 갈렸다.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다이묘와 사족들도 정치에 참여시키려한 반면, 오쿠보는 현행 번사 중심의 체제를 원했다.결과적으로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의 의..
조선 서계 사건과 정한론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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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그렇기에 총 네가지 사설 무역로를 두었다. 사설인 이유는 막부가 아닌 번이 주도했기 때문이다.이를 네개의 입구(四つの口)라고 한다.그 네개의 입구는 다음과 같다.마쓰마에구치: 가라후토-에조치 방면(울치인 및 청의 연해주로의 교역)-마쓰마에번이 주도나가사키구치: 나가사키 방면(네덜란드 및 청과의 주인장 무역)-나가사키 봉행소가 주도사쓰마구치: 류큐 방면-사쓰마번이 주도그리고 마지막 네번째가 바로 쓰시마구치이다. 쓰시마방면이고 쓰시마번이 주도한 조선과의 무역을 뜻한다.이 네 방면의 무역을 제외한 무역은 전부 밀무역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국가 간 외교관계를 맺..
이와쿠라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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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멀기에 일본은 대규모의 사절단을 계획하게 되었다.조선이야기는 서계사건과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870년(메이지3) 메이지 신정부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특정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을 조직하였다.사절단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나오요시이하 생략 참고로 이때 동반해서 보낸 유학생들 멤버가 짱짱하다.나카에 조민, 단 다쿠마, 마키노 노부아키, 쓰다 우메코, 오토리 게이스케 등등이때 유학을 간 인사들은 이후 메이지시대의 주요 지식인 및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불평..
메이지 유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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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에도성의 성문이 열리고 얼마 안되어 연호가 새롭게 바뀐다.새로운 연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메이지(明治)였고,겸사겸사 일세일원제가 도입되면서 사학과와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을 도와준다.덴노, 쇼군 치하에 연호 대여섯개 쓰는 시재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여기에 덤으로 1872년(메이지5) 그레고리력이 도입된다. 이제 날짜 이 중 체크 안해도 되는 거다. 1868년(메이지1) 메이지 덴노는 에도를 도쿄(東京)로 개칭함과 동시에 도쿄 천도를 선언했다.에도성은 황거로 개량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외교관계를 맺은 주요 국가에 신정부의 수립 및 새로운 덴노의 즉위를 알렸고,이어 태정관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산조 사네토미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직위 상 최고직은 산조 사네토미가 차지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그 휘..
사카모토 료마와 삿쵸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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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좌막파에 비교했을 때 도막파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중심을 잡아줄 인물의 부재였다.좌막파에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아이즈번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막부와 조정을 중개하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그 누구보다 막부 수호의 의지는 강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이 있었던 반면,도막파는 안세이 대옥과 덴구토의 난으로 미토번이 좌막파로 전향했고,난벽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번은 공무합체론의 선봉처럼 활동했다.도사번은 번 내 여론이 좌막과 도막으로 양분되어 이에 따른 혼란도 있었고,조슈번은 결국 조정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도막파의 승리로 이어지기에도막파의 중심 역할을 해준 그 인물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잠시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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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따라 시간 순서가 왔다갔다 하는 개판인 분큐와 겐지 연간을 지나드디어 일세일원제 이전 마지막 연호인 게이오에 들어섰다.남은 건 삿쵸동맹과 사쓰도맹약, 2차 조슈 정벌, 삿쵸는 영국-막부는 프랑스와 손을 잡는 정세,그리고 대정봉환에 대한 설명뿐이다.그 다음부터는 이제 메이지이다. 이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으로 줄곧 다뤄야하지만 설명이 미흡했던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여기 언급되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와 대정봉환을 언급함에 있어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우선 사쓰마이다.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사쓰마번사로 막말 사쓰마 번정을 관할한 존황양이파 인사이다.존왕양이파이기에 유배도 다니고 실각도 하고 고생했지만그가 없이 사쓰마번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사쓰마번의 중신이었기에 사쓰마번과 관련된 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