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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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大政奉還)국정을 봉하여 조정에 돌려주었다해서 좌막파와 도막파의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되겠다.최종결정권자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무작정 존중하는 건 천주의 시대 일본에서 말이 되는 게 아니다.말이 되었으면 존황양이 따위 진작에 끝났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요시노부 쇼군의 앞으로아이즈번주이자 교토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번주이자 교토소사대를 총괄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고베 해군교습소의 설립자였던 가쓰 가이슈 등이 진언했고결국 요시노부 쇼군도 좌막파인사들의 뜻에 동참하게 되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1월, 아직 연호도 바뀌지 않은 무진년초사쓰마번이 장악한 조정에서 요시노부 쇼군의 영지와 내대신 직위를 반환하기로 결의했고,요시노부 쇼군은 이에 대한 항의로 오사카성에서 거병한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공무합체론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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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돌려 분큐 연간으로 돌아가보자.조슈는 조슈대로, 사쓰마는 사쓰마대로 꼬장을 부리고 있고,젊은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자기 손으로 부리려 하고 있고,젊은 이에모치 쇼군은 조정을 자신과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쓰고 있다.그 와중에 천주사건은 끊이지 않고, 조정은 좌막파와 도막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중신으로 일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개하던 인물이 누구였냐?바로 쇼군 후계자로도 언급되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이다.1862년(분큐2) 고메이 덴노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부를 이용해 전쟁할 생각뿐이었으며,이에 대해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는 큰 불만을 가졌다.결국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토시 긴사토는 양위를 건백했고,이건 당연히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흑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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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6월 3일(양력 1853년 7월 8일)일본을 개국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함 네척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 우라가(도쿄만)에 당도했다.미국의 필모어 대통령은 매튜 페리 제독에게 일본의 개국을 명령했고,필요시 무력행동까지 허가받았으며, 류큐와 오가사와라는 영토로 확보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게 된다.네 척의 배가 마카오에 도달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나가사키 봉행에 서신을 보냈고,그 덕에 놀라워하고 불안해한 민중과 달리 에도 막부는 태연하게 대처했다.다만 그렇다고 해서 막부가 무얼 한 것은 아니었다.구미세계와 동아시아의 격차는 단기간에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좁힐 수 있다해도 당시 막부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막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병상에 있어 국사를 논할..
막말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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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는 재난의 시대였다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일본의 전통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연호 겐로쿠(元祿)는 대지진(1704-겐로쿠16)과 함께 끝이 났고,새로운 연호 호에이(宝永)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본사 최강의 대지진이 일어났고(1707-호에이4),같은 해 후지산의 역대 마지막 분화가 시작해 2년 간 지속되었다.잊을만하면 대화재가 발생해 에도와 교토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고,전세계적으로 닥친 이상저온현상으로 잊을만 하면 대기근이 덥쳐왔다.대화재 복구에는 세금이 쓰여야 하니 막부재정은 악화되었고,대기근으로 공납할 돈이 없으니 잇키(一揆)가 군발적으로 발생했다.막부는 이 사단을 해결하기 위한 화폐개혁과 정치 개편을 단행했으나 무엇하나 뚜렷한 성공을 보이지 못했다.오히려 막부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