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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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대정봉환(大政奉還)국정을 봉하여 조정에 돌려주었다해서 좌막파와 도막파의 충돌이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되겠다.최종결정권자가 선택했다고 그 선택을 무작정 존중하는 건 천주의 시대 일본에서 말이 되는 게 아니다.말이 되었으면 존황양이 따위 진작에 끝났지.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요시노부 쇼군의 앞으로아이즈번주이자 교토수호직이었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번주이자 교토소사대를 총괄한 마쓰다이라 사다아키,고베 해군교습소의 설립자였던 가쓰 가이슈 등이 진언했고결국 요시노부 쇼군도 좌막파인사들의 뜻에 동참하게 되었다. 1868년(게이오4) 음력 1월, 아직 연호도 바뀌지 않은 무진년초사쓰마번이 장악한 조정에서 요시노부 쇼군의 영지와 내대신 직위를 반환하기로 결의했고,요시노부 쇼군은 이에 대한 항의로 오사카성에서 거병한다..
대정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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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소카이 정권과 신센구미, 교토 미마와리구미의 활약으로 교토의 좌막파의 도읍이 되었다지만히토츠바시 요시노부에게 발탁된 사쿠마 쇼잔이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암살당하는 등교토는 여전히 존황양이 천주가 자행되고 있었다. 1866년(게이오2) 막부는 군사체계는 전부 개편한다.고베 해군견습소를 기반으로 막부해군을 개선함과 동시에, 막부육군을 설치하고 네덜란드인 장교를 영입해 훈련했다.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에조치 하코다테에 고료가쿠를 건설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이러한 정책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었고, 마침 이 즈음에 프랑스가 막부에 접근했다.막부는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자 했고, 그 결과 삿쵸는 영국, 막부는 프랑스와 결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한편 존황양이파 공경 22인은 이와쿠라..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공무합체론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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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돌려 분큐 연간으로 돌아가보자.조슈는 조슈대로, 사쓰마는 사쓰마대로 꼬장을 부리고 있고,젊은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자기 손으로 부리려 하고 있고,젊은 이에모치 쇼군은 조정을 자신과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쓰고 있다.그 와중에 천주사건은 끊이지 않고, 조정은 좌막파와 도막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중신으로 일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개하던 인물이 누구였냐?바로 쇼군 후계자로도 언급되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이다.1862년(분큐2) 고메이 덴노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부를 이용해 전쟁할 생각뿐이었으며,이에 대해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는 큰 불만을 가졌다.결국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토시 긴사토는 양위를 건백했고,이건 당연히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안세이 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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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히코네번의 후다이 다이묘이며, 그의 조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붉은 귀신 이이 나오마사이다.히코네번의 번정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비할 데 없는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이후 에도로 와서 우라가 수비를 담당했다.흑선사건을 목격하자마자 그간의 쇄국론을 포기하고 개국론을 펼치기 시작했으며,아베 마사히로 중심의 막정에 있어 외교 방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겸사겸사 아베 마사히로, 홋타 마사요시 등과 함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옹립하며난키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안세이 5개국 조약이 난키파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고, 히토츠바시파 다이묘들이 이에 불만을 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정치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문제는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해 고메이 덴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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