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北海道). 에도시대까지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린 곳으로, 아이누인의 땅이다.
이곳이 일본의 영토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로,
1599년(게이초4) 가키자키 요시히로가 지금의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을 설치하고 성을 마쓰마에로 바꾸면서부터였다.
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대비해 막부직할령이 되기도 했고,
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대비해 홋카이도를 넘어 가라후토(사할린), 치시마(쿠릴열도)까지 탐험과 측량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일본영토였다기 보다는,
일본의 권한 하에 있는 아이누인의 땅에 가까웠다.
일본영토로 완전히 편입된 계기는 하코다테 전쟁으로,
보신전쟁 말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에조 공화국을 설립했고, 이후 신정부군에게 항복하며 완전한 일본영토가 되었다.
에조치가 아닌 고키시치도의 권역으로 포함하기 위해 신조어인 홋카이도로 개칭된 것도 그 때였다.
선술했듯, 에도 시대 내내 이곳은 일본의 권한이 미쳤을 뿐 일본인이 사는 곳은 굉장히 적었기에,
홋카이도를 일본의 사회문화적 영토로 확립하기 위해 개척사가 파견되었다.
홋카이도 개척사가 설치되었고, 그 수장으로 하코다테 전쟁에서 사령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가 임명되었다.
홋카이도 개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위해 홋카이도 정중앙 평야에 삿포로시가 설치되었고,
이후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구시로, 아사히카와와 같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를 넘어 가라후토와 치시마에도 개척사가 파견되었는데, 이는 후술하겠다.
구로다 기요타카가 주도한 홋카이도 개척사업은 1차 산업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의 지원이 그리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구로다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새로운 항구와 상업 활돌처가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서양 상인들은 홋카이도 개척에 참여하게 되었고,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자본을 성장시켜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홋카이도대학의 설립자인 윌리엄 S. 클라크이다.
이러한 서양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개척사에게 더 적극적인 연계를 요구했고,
이는 홋카이도가 제2의 안세이 5개국 조약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1880년(메이지13) 11월 구로다 기요타카는 정부가 1000억엔을 투자해 만든 관유물에 대해
경영부진을 이유로 이를 민간에 불하하겠다는 계획을 정부에 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관유물은 공장 및 공장 부지, 창고 등의 임대 시설, 탄광 등의 생산 시설 등등을 의미했다.
원래 이러한 관유물은 정부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개척사의 자산이었지만,
이대로면 조용히 망하니 최선의 조치를 하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민간에 국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도, 선술한 클라크 등의 외국인도 이 관유물을 매입하려 했고, 이는 당시 자유민권운동을 자극할 여지가 컸다.
1880년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대응이자, 정부의 방향성이었던 제헌 및 신체제에 대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당시 정권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 모두 서양의 체제 및 국제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전반적인 설계에 있어 걸림돌은 없었다.
다만, 새로운 체제의 형태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게 갈렸다.
오쿠마 시게노부의 경우, 성공적으로 정착한 입헌군주제의 대표였던 영국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길 원했고,
반면 이와쿠라 사절단의 경험과 자신의 식견에 기반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 있고 독일식 군주제가 폐지된 현 시대에서 보면 정답은 나와있어 보였지만,
당시에는 영국과 독일 모두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한 제국주의 국가였기에 성향의 차이일뿐 틀린 것은 없었다.
문제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했을 때에는 이야기가 달랐다는 것이었다.
이토를 중심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고 주도,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이 집결해 있었고,
오쿠마를 중심으로는 야노 류케이, 이누카이 츠요시, 오자키 유키오 등의 신진관료들이 모여있었다.
정권을 양분했음은 즉 이 안에서 파벌이 갈렸다고 해석해도 무방했으며,
이토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이토파와 오쿠마파로 갈린 시점에서 홋카이도 개척사의 관유물 불하가 제기된 것이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사를 지원할 돈도, 여력도 부족했기에, 구로다 기요타카의 의견을 전부 받아들였다.
우선 관유물의 불하를 허가하며, 추후 홋카이도 개척사를 폐지해 홋카이도에 현을 설치한다.
굉장히 현실적인 대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권파의 귀에 들어가면 외국인에게 국유재산을 넘긴다는 논란이 분명했다.
1881년(메이지14) 이토, 오쿠마를 포함해 참의들이 아타미시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아타미 회의)
선술한 관유물의 불하와 개척사 폐지에 모든 참의가 동의했고, 그렇게 끝나면 될 일이었지만,
누군가가 아타미 회의의 결과를 민간에 유포하는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대체 누가 발설한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외국인에게 정부가 국유재산을 넘긴다는 항의가 당연하게도 나오고 말았다.
누군가는 책임지고 옷을 벗어야 할 정도의 상황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감각은 정말로 남달랐다.
오쿠마 시게노부와 그 일파에게 짬을 때리자!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 사태와 논란에 대해 모든 결정은 오쿠마가 한 것이며 오쿠마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메이지 덴노에게 상주해버렸다.
게다가 메이지 덴노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메이지 덴노의 권한을 조정했던 이와쿠라 도모미 역시 이토를 지지해줬고
(애초에 이와쿠라는 이토의 정치적 스승에 가깝다)
결국 메이지 덴노가 관유물 불하 논란에 개입하며 오쿠마 시게노부는 모든 책임을 억울하게 떠맡게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사임했고, 오쿠마를 따르던 젊은 관료들도 따라서 사임했으며,
그들은 다같이 사이좋게 자유민권운동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를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라고 한다.
이후 입헌개진당을 창당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위 글에 나오듯 반정부 민당으로 활약했다.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논란이 정치적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곧 증명되었다.
선술했듯 메이지 정부는 애초에 홋카이도 개척사를 케어할 여력이 되지 못했고,
결국 오쿠마가 사임하고 얼마 안되어 개척사의 관유물에 대한 불하를 허가하게 되었다.
관유물 논란이 재점화될 때 임오군란이 터져줬고, 그렇게 무난히 불하가 허가된 것이었다.
1882년(메이지15) 홋카이도 개척사는 수순대로 폐지되어 네무로, 삿포로, 하코다테 3개현이 설치되었고,
1886년(메이지19)에는 3개현이 페지됨과 동시에 홋카이도청이 설치되었다.
지금 삿포로에 놀러가면 볼 수 있는 벽돌건물은 이 때 지은 것이다.(1888년 완공)
한편, 영국식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한 오쿠마의 실각은
곧 정부 내에서 독일식 입헌군주제 도입을 지지하는 세력만 남았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독일식 입헌군주제에 대한 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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