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당은 창당하면서 8대이상을 설정했는데,
그 안에는 부, 교육, 정치적 권한에 대한 만민평등, 토지, 자본, 교통수단 만민공유, 군비 철폐 등이 있었다.
딱 봐도 정부가 견제할 명분을 정면에서 제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하루만에 해산된 것이기도 했다.
사회민주당이 해체 직후 고토쿠 슈스이는 정치단체인 헤이민샤(平民社)를 결성했다.
헤이민샤는 1903년 평민신문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해 비전론을 주장했고, 1904년에는 공산당 선언을 일역하기도 했다.
아 물론 출간하자마자 금지당했다.
같은 해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에 가타야마 센이 부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렇듯 헤이민샤의 좌익활동은 점차 범위와 강도를 넓혀 갔고, 이걸 일본 정부가 좌시할 리가 없었다.
특히 비전론이나 고토쿠, 가타야마 등이 러시아 인사들과 교류하던 것은 눈에 가시였는데,
사회민주당이 창당하고 헤이민샤가 활동하던 시기가 러일 간이 격렬히 충돌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그 때이다.
고토쿠 슈스이 등이 러일전쟁에 대한 반전론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묵살당했다.
전시 상황이라는 점에서 헤이민샤와 고토쿠 슈스이 등을 그냥 죽여도 상관 없었지만,
아시아의 문명국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지, 일본 정부는 고토쿠 슈스이 등의 사회주의자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헤이민샤가 몇년 간 살아남은 데에는 일본이 언론의 자유가 있는 문명국이라고 보여주는 식의 대처라는 평이 있다.
그리고 그만큼 일본 정부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헤이민샤를 해산시킬 여력이 있었음을 반증하기도 했다.
1904년 내각에 의해 사회주의연구회가 해산당했고, 러일전쟁이 끝나가는 1905년에는 헤이민샤마저도 해산당한다.
1905년 신문지조례로 평민신문이 절간되었고 결국 고토쿠 슈스이도 투옥되었다.
출옥 후 고토쿠 슈스이는 샌프란시스코 가는데, 이 때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와 교류하게 된다.
그렇게 점차 고토쿠 슈스이는 아나키스트로 변해갔다.
고토쿠의 아나키즘을 강화하는 사건은 바로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일어난 대지진이었다.
대지진 이후의 복구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힘을 합쳐 복구에 힘을 더했고
그 덕에 샌프란시스코가 빠르게 복구되어가는 걸 본 고토쿠는 민중의 힘을 체감했다며 더더욱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강화해간다.
복구가 빠르다 해도 결국 대지진으로 고토쿠 슈스이는 귀국길에 오르는데,
고토쿠가 미국에 있던 동안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변했다.
포츠머스 조약과 계엄령
러일전쟁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mtw31082.tistory.com
게이엔 시대는 가쓰라가 강경하게 밀어 붙이면 후임 총리인 사이온지가 뒷처리를 하는 식의 정치 행정이 반복되었는데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1906년(메이지39) 합의대로 시작된 1차 사이온지 내각은 비교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온건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중재안을 내놓는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이 그랬듯 칼같이 썰어버릴 수도 있으나,
그랬다가는 어디선가 불만이 폭발해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는 걸 서남전쟁과 사족 반란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1906년 그렇게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합법 정당인 사회당이 창당된다.
사회당은 일본의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의 중심이 되었으며,
사이온지의 융화책에 호응해 우선 의회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한 온건한 방향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토쿠가 귀국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아나키즘에 제대로 물들어 온 고토쿠 슈스이에게 이러한 온건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고토쿠는 귀국하자마자 노동총파업을 주장했고, 정부를 향해 실력을 행사하는 직접행동론을 주장한다.
반면 가타야마 등은 보통선거를 확립하자는 '의회행동론'을 주장했고 이들은 첨예하게 부딪힌다.
결국 고토쿠과 가타야마는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 덕인지 가타야마는 1930년대까지 살 수 있었다.
가탸야마 센이 의회행동론을 저술하고 사흘 후 사회당 당 내 회의가 열린다.
그 결과가 당규 1조를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개정한 거 보면 고토쿠의 의견이 승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당의 수명이 얼마 안남았음을 역설한다. 정부에게 탄압할 명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일본 근현대사 > 메이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 (0) | 2025.01.21 |
---|---|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1 (0) | 2024.12.12 |
메이지 후반의 정치 분위기 (0) | 2024.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