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
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센)와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했고
그렇게 사회당은 고토쿠파와 가타야마파로 분할되기 시작했다.
고토쿠의 활동에 있어 중심이 된 것은 헤이민샤였다.
1907년(메이지40) 고토쿠는 헤이민샤와 평민신문을 부활시켰으나 이후 정부의 탄압으로 해체와 부활을 반복했다.
1909년(메이지42) 고토쿠는 직접행동론을 설파하는 '자유사상'을 집필했고, 바로 절간당했다.
1907년 평민신문에 봉건적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이 사설로 출간되었고
그 덕에 평민신문은 다시 절간되었는데
이 사설을 쓴 사회주의자 야마구치 고켄은 그대로 신문지조례로 인해 투옥되었다.
이 야마구치 고켄은 고토쿠파와 가타야마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인물로,
당시 사회당 내 당쟁에 피로해진 인사들은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당을 개편하자고 뜻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1908년(메이지41) 결국 야마구치 고켄의 형이 끝났고, 야마구치를 환영하는 대규모 환영회가 열렸다.
원래는 환영회만 열고 끝내는 것이었는데, 강경파를 중심으로 밤에 깃발을 들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정부를 위한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일본 정부는 치안경찰법에 의거해 깃발을 들고 행진하던 강경파를 전부 체포했고 투옥시켰다.
고토쿠 슈스이는 당시 고치에 가 있어 변을 피했지만
아라하타 간손, 오스기 사카에, 무라키 겐지로, 우쓰노미야 다쿠지 등 고토쿠와 친한 강경파들이 전부 투옥되었다.
겸사겸사 사회당도 강제 해산되었다.
투옥 중 뜬금 없이 고토쿠 슈스이와 관련된 스캔들이 퍼지고 말았는데
바로 고토쿠의 동지인 아라하타 간손의 처 간노 스가가 고토쿠 슈스이와 불륜관계였다는 것이었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불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결국 고토쿠 슈스이는 1909년 이혼하여 대놓고 간노 스가와 사귀었다.
적기 사건 당시 붉은 깃발에 무정부공산, 사회혁명, SOCIALISM과 같은 문구로 인해 사회주의자 문제가 다시 대두되자
일본 정부 내에서는 사회주의자에게 비교적 온건했던 1차 사이온지 내각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1908년 사이온지 긴모치는 사임했고, 게이엔시대답게 가쓰라 다로가 후임 총리에 내정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등 일본 정계 내의 초연주의 인사에게 있어 사회주의자는 일단 제거할 이유가 타당한 존재였고.
특히 그 중 고토쿠 슈스이 등의 극단주의적 무정부주의자는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큰 인물로 인식되는 상태였다.
따라서 1909년 일본 정부는 고토쿠 슈스이, 간노 스가 등의 24인을 체포했다.
사유는 상당히 간단했다.
메이지 덴노 암살 모의
이러한 혐의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격렬히 항의했지만
경찰은 고토쿠 등이 히비야 공원에서 석유와 인화성 물질을 대동해 덴노를 습격하려 했다고 증거와 정황을 들이민 상태였다.
결국 메이지 덴노를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사건 가담 혐의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911년(메이지44) 메이지 덴노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전환된 12명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형장으로 향할 명단에 고토쿠파의 핵심인 고토쿠 슈스이, 간노 스가 등이 포함되어 있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렇게 고토쿠 슈스이는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향년 39세.
일본의 사회주의는 대역사건 이후 약 5년 간 겨울의 시대라 불리며 몰락하게 된다.
이 동안 사회주의는 천황 암살을 모의한 반국가적인 적대사상으로 인식되었으며,
고토쿠 슈스이 등이 주도한 마르크스 유물론이나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운동은 완전히 몰락했다.
대신 이후의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센 등이 주도하는 기독교 사회주의가 주류가 되었고
기독교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다이쇼 시대의 하층민 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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