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덴노
일본국 122대 덴노이며 휘는 무쓰히토(睦仁)다.
근대 천황제의 시발점이고, 그의 재위 기간에 있던 일본의 근대화 및 산업화,
그리고 탈전통적인 온갖 발전을 통틀어 메이지 유신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유신 군주, 무쓰히토 대제(혹은 성제)라고 불리며 메이지 유신의 얼굴격인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으며,
메이지시대 내내 만민의 아버지이자 일본의 발전과 성장을 내려준 성군으로 추앙받아왔다.
군주 메이지 덴노의 역할을 보면 상당히 이중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지 14년의 정변에 있어 관련 논제 중 하나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독일식 입헌군주제와 오쿠마 시게노부의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모두 수용한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메이지시대의 모든 정치활동은 덴노의 칙령 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의 임명을 시작으로 대일본제국헌법을 기반으로 한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모든 총리는 덴노가 임명한 것이기도 했다.
이를 대명강하(大命降下)라고 한다.
그 외에도 주요 관청 혹은 부서의 설치, 주요 법이나 조례 등의 공포, 국회의 개설 등등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진행된 것이 많다.
이러한 면을 본다면 황제가 중심이 되어 총리와 장관이 대리하여 주요 업무를 관할케 하는
독일식 입헌군주제에서의 면모가 메이지 덴노에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그렇다고 해서 독일 제2제국의 빌헬름 1세만큼 영향력과 권한이 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빌헬름 1세가 그랬던 것처럼 귀족의 대표로서 총리와 함께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자리하지도 않았고,
정책 결정권에 있어 뚜렷한 의견표출이나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정치적인 영향력은 분명했고, 정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귀족원과 추밀원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보였다.
입헌정우회의 설립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 간의 정쟁에서의 면모가 이러한 영향력의 예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이 대내정책이나 대외적인 외교나 전쟁 등에 대해 필수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책에 대해 발언권을 내세우려 하면 공가 출신인 산조 사네토미나 사이온지 긴모치가 적극적으로 이를 만류시켰다.
즉 그저 정치적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큰 유사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에 있어 개혁군주 메이지 덴노의 역할을 어떻게 해석함이 옳을 것인가?
상당히 어려운 주제일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상징'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한다면
메이지시대에서 메이지 덴노가 차지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도시대와 그 이전 시대에 있어 덴노는 신과 동일한 존재였다. 민간에서는 정말로 지상에 강림해 존재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다르게 말하면 그 존재만 확실할 뿐 황거 밖을 나오지 않기에,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전설의 존재였다.
공무합체론과 존황양이론의 갈등이 이어지던 시대 고메이 덴노는 신사 참배를 위해 황거 밖으로 행차했고
그렇게 몇백년만에 교토의 대중 앞에 얼굴을 보였다.
덴노의 권위를 강화해 민간을 중심으로 공무합체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이러한 고메이 덴노의 노력은
아들인 메이지 덴노 대에 들어가며 오히려 존황양이파 메이지 신정부를 강화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보신전쟁 이후 메이지 덴노는 전국을 수차례 순행했는데
이는 먼 옛날 진시황이 그랬듯, 전국에 모습을 비추며 지지율을 높임과 동시에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위에서 선술했듯, 메이지 신정부의 주요 정책은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공포되어 그 합당함을 확보했고
그렇기에 완성된 것이 메이지 유신이라면 메이지 유신에 있어 메이지 덴노가 가지는 상징성은
그 무엇보다도 큰 영향력과 논리성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르게 말하면, 메이지 덴노는 상징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영향력만 발휘했을 뿐
실제로 정책은 유신삼걸, 조슈삼걸, 민당파 등등이 제시해 형성된 것이니
개혁군주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을까?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쉽게도 메이지시대에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 의견 자체가 덴노를정치적 주체가 아닌, 일종의 기관으로 여기는 것이고,
틀린 해석이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쇼와시대는 가야 그 주제를 다루기가 좋아진다.
무엇보다 천황제는 너무 어려운 주제라서 너무 깊게 파며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1912년(메이지45)
일본이 청을 꺾고 극동의 패자가 되었으며,
의화단 운동을 통해 국제적으로 극동의 헌병으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러시아를 꺾고 제국주의 국가로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편입하여 일본을 거대한 제국으로 만든.
이 위대한 성장과 변혁의 원동력이라 당시에 여겨진 개혁군주
메이지 무쓰히토 덴노가 붕어했다. 향년 59세. 사인은 당뇨 합병증에 의한 요독증의 악화였다.
장지는 후시미모모야마로 결정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신소재 중 하나였던 콘크리트로 봉분을 덮었다.
위 사진 도리이 너머의 콘크리트 봉분이 바로 메이지 덴노릉이다.
개혁군주 메이지의 죽음으로 일본은 슬픔에 빠졌고,
유신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통탄을 금치못해 노기 마레스케는 할복으로 그 충성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왜 그래야했는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일본 육군의 상징적인 인물인 노기 마레스케도 메이지 덴노의 곁으로 가버렸다.
차기 덴노에는 메이지 덴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 오르게 되었다.
메이지의 뒤를 이을 새로운 연호는 다이쇼(大正)로 결정되었으며
그렇게 유신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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