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과 아관파천
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물론 변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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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메이지28)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고,
그 조약의 내용대로 대만과 펑후열도, 요동반도를 획득했다.
이 지역들이 메이지 초기 일본이 편입한 류큐(오키나와), 에조치(홋카이도), 치시마(쿠릴열도)와 보이는 가장 뚜렷한 차이는
전통적으로 일본과 간접적으로 교류한 지역이 아닌, 완전한 외국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비록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얻은 영토 중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는 반환했지만,
대만이라는 뚜렷한 신영토는 향후 제국주의 일본이 나아갈 실험실처럼 작용했다.
1895년 말 위 글에 나온 것처럼 대만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일본 최초의 군정청으로 탄압과 친일파 양성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활용하며 향후 대만의 식민통치를 안정화시켰다.
여기서 적을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대만 통치는 다른 군정청에 비해서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만총독부만으로는 향후 일본의 제국 진출에 있어 그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 부족했다.
따라서 일본은 원활한 정책 결정 및 추진을 위해 1896년(메이지29) 척식무성을 설치했다.
척식무성은 대만총독부의 상위 기관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설치되는 가라후토청, 관동도독부, 조선총독부 역시 척식무성의 하위 기관 역할을 했다.
남양청이 언급 없는 데에서 유추 가능하듯 식민통치가 안정화되며 폐지되었다가
2차대전을 앞두고 다시 부활했고 2차대전기 대동아청에 흡수되었다.
포츠머스 조약과 계엄령
러일전쟁부제목을 하나 달자면육지의 노기, 바다의 도고 물론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군사학이나 전술 무기 등에 대한 부분은 생략할 것이다.1904년 2월 8일 인천일본 군함의 호위를 받은 수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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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메이지38) 러일전쟁의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가라후토 남부를 편입했고 남만주에 대한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으며,
기존에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뤼순의 조차권을 획득했다.
일본은 뤼순조차지에 관동주를 설치했고 관동주 통치를 위한 군정청으로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관동도독부는 1919년(다이쇼8) 관동청으로, 1934년(쇼와9) 관동주청으로 승격되었지만
관동도독부의 역할은 행정적인 것보다는 향후 대륙침략 및 만주 확보를 위해 필요한 교두보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군정청과 비교했을 때 행정적인 역할보다는 군사적인 면에 집중했던 경향이 상당히 강했다.
관동주가 설치됨과 동시에 관동주 보호를 위해 관동군이 설치되었다.
그와 함께 의화단 운동으로 확보한 주요 거점의 주둔군도 관동군으로 편입되었다.
표면적 역할으 관동주 수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주와 중국방면 진출을 위한 선봉대로 계획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 어떠한 일본군 내의 예하조직보다 군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다르게 말하면 일본에게 있어 향후 가장 중요해질 군사조직이었기에 육군대학의 주요 인사들이 파견되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관동군 사령관이나 관동군 사령관 출신 인사들의 발언권이 눈에 띄게 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관동도독부는 행정적 역할보다는 관동군을 위한 기관처럼 변질되어갔다.
주객이 전도되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이상한 관계가 된 것이다.
애초에 관동도독부는 행정적인 역할을 대부분 남만주철도회사에 이양한 상태였다.
1906년(메이지39)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는 창춘-뤼순 간의 동청철도를 부설 및 경영하기 위해 설립된 국책회사로
장춘 이남의 각종 철도에 대해서는 부설 및 운영권을 가진 회사였다.
만철은 철도의 유지 및 관리를 위해 철도 부설지 및 그 인근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고
철도를 따라 만철부속지가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분명 청의 영토 내의 만철 소유지였지만 청의 그 어떠한 권한이 미치지 않았고
치안 유지는 관동군에 의해, 사법권은 일본 영사에 의해, 행정권은 만철에 의해 집행되는 곳이었다.
즉 만철은 일본 제국주의의 행정적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일본 정부에게 있어 만철의 중요성은 곧 철도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래 물자 운송에 있어 철도는 기반시설 중 가장 핵심이라 여겨지던 것이었고
그레이트 게임과 제국주의 확장 구도를 거치며
철도는 군인과 군수물자를 운송하고 빠르게 충원할 수 있는 전쟁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향후 만주와 중국 방면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위해 사전작업으로 남만주에 철도를 부설한 것이었고,
이를 유지, 관리 및 부속지를 확보하는 것이 바로 만철의 임무이자 목표였던 것이었다.
즉 일본의 제국주의적 목표로 인해 만철의 권한은 동인도회사와 비슷하게 정치적 기관 인양 확장되었던 것이다.
1911년(메이지44)
한일합방과 고토쿠 대역사건의 처리를 끝으로 임기를 끝낸 2차 가쓰라 내각의 후임은 합의대로 입헌정우회의 사이온지 긴모치가 내정되었다.
2차 사이온지 내각이 수립함과 동시에, 일본은 향후 진출 목표로 만주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관동군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육군대신 이시모토 신로쿠가 관동군에 무려 2개 사단을 증설하자고 주장하는 데에 이르렀다.
사이온지 내각총리대신은 조선총독부 등 돈이 들 곳이 많아 이를 거부했지만
육군과 야마가타파를 중심으로 2차 사이온지 내각에 거칠게 항의하면서
2개 사단 증설문제는 정치적 화두로 부상하게 되었다.
2개 사단 증설에 대한 찬반이 오가던 중 이시모토 신로쿠 육군대신이 사망했고
메이지 덴노가 병상에 누워버리며 일단 이 화제에 대한 논의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1911년 말 청에서 일어난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격화되었고,
그 결과 1912년(메이지45) 2월 신해혁명으로 청이 멸망해버리자 일본 정국은 바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개 사단 증설 문제가 부활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메이지 덴노가 붕어했다.
메이지 덴노와 메이지 유신
메이지 덴노일본국 122대 덴노이며 휘는 무쓰히토(睦仁)다.근대 천황제의 시발점이고, 그의 재위 기간에 있던 일본의 근대화 및 산업화,그리고 탈전통적인 온갖 발전을 통틀어 메이지 유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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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끝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곧
제국주의 일본의 군국주의적 방향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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