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일본과 조선
조선 서계 사건과 정한론 정변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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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진대로, 조선의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일본은 군함을 보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구원해 일본으로 이동했으며
이들의 동지인 홍영식은 고종을 지키다가 청군에게 사살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본으로 이동한 후,
김옥균이 암살되기 전까지, 박영효와 서광범이 갑오개혁에 참여하기 전까지, 서재필이 귀국해 독립협회를 세우기 전까지,
일본에서 이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우선 서광범과 서재필은 미국으로 이동했다.
서광범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했고, 서재필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의료계에서 일했으며,
두명 모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으로 귀화했다.
서광범은 케네스 서, 서재필은 필립 재이슨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미국인 국적을 평생 유지했다.
박영효의 경우,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이동했으나 영어를 못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서 일약의 스타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일본에서 김옥균은 꺼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빛이라 인식되었고,
그렇기에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등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러니 굳이 다른 동지들 따라서 미국으로 가야할 이유는 없었고, 그렇기에 일본에서 동지들과 작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은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거리였다.
미국으로 가려면 태평양을 건너야 하기에 조선이 갑신정변의 역적들을 잡으러 가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 조선 관련 커뮤니티가 없어 소재를 찾기도 힘들었다.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유학생도 있고 상인도 있으며 전통적으로 외교관계가 체결되어있던 국가였다.그러니 조선의 입장에서 이 역적들의 소재지를 파악하기도 수월했고, 그렇기에 다들 미국으로 가려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조선의 김옥균 암살시도는 상당히 빈번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당시 김옥균과 교류하던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등은 김옥균을 보호할 일종의 임무가 있기도 했다.그렇기에 이러한 재야인사는 물론이요,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 등도 김옥균을 보호하려 애썼는데,김옥균이 이를 거부했다.문제가 무엇이었냐면, 일본의 식객이던 김옥균은 유명세때문인지 일본생활에 젖어들며 유흥에 빠지기 시작했다.수많은 게이샤들과 온갖 스캔들을 일으켰고, 숨어살던 집의 모친을 임신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제발 숨어지내라는 일본의 요청도 무시하고 온갖 장소에 쏘다니며 암살 위협을 받았고결국 일본은 김옥균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와 홋카이도, 오가사와라 등지로 귀양 보내기도 했다.일설에 따르면 도야마 미쓰루가 '살고 싶으면 바보처럼 행동하라'고 조언했고 그래서 그랬다나 뭐라나.
이렇게 김옥균이 스캔들을 뿌리고 다닐 때에 박영효가 일본에 돌아왔다.박영효는 한량이 된 동지의 행태에 충격을 받았고,김옥균과 달리 일본 정부가 원하는대로 숨어살았다.자연스레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은 김옥균보다 박영효에 주목하기 시작했고,이는 자연스레 갑오개혁의 중추로 박영효가 동원된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김옥균은 1894년(메이지27) 주일 청국공사 이경방을 만났는데,당시 이경방이 말한 삼화주의(한중일이 힘을 합쳐 서양에 저항하자는 것)에 감화되어김옥균은 그대로 이경방의 부친인 이홍장을 만나러 청으로 이동했다.김옥균이 청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은 금세 조선에 전달되었고, 조선을 대표하는 엘리트 중 한명이었던 홍종우가 상하이에 자객으로 파견되었다.향년 43세. 도쿄에 있는 김옥균의 묘비 내용처럼, 김옥균은 비상한 시기를 만나 비상하게 죽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풍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대로 상륙해 성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중인 청군을 격퇴했다.이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평양성으로 향한 청군을, 남으로는 전라도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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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빛이라 인식되던 김옥균이 청에서 죽었음은 일본 내에 반청-반조선 감정을 고조시켰고얼마 안가 청일전쟁이 발생했다. 청일전쟁 도중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갑신정변 가담자에 대한 사면령이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박영효와 서광범은 귀국해 갑오개혁의 중추로 활약했다.여기에 더해 1895년(메이지28) 1월에는 서재필 역시 귀국했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이 조금만 더 숨어있었더라면 갑오개혁과 그 이후의 정국에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할 수 있지만갑오개혁 정국에서의 박영효의 실권 장악 과정과,1890년대에 이미 일본정부는 전략적으로 김옥균을 거의 손절하고 박영효에 집중했던 걸 생각하면만약 살아서 갑오개혁 정국에 참여했다해도 그렇게 핵심적인 역할은 하지 못하고오히려 얼마 안가 실각하거나 심지어는 상하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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