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7년 5월 15일
오카와 슈메이, 니시다 미쓰기 등 국가주의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 혈맹단원 미카미 다쿠를 필두로,
해군 장교, 육군 사관생도 등으로 이루어진 12명의 인원은 계획한 장소로 이동하여 제거할 타겟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중 9명이 총리 관저로 이동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의 핵심 목표는 명백히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츠요시였다.
오후 5시. 야스쿠니 신사에 집결한 가담자들은 승용차를 타고 각자의 포인트로 이동했다.
5시 27분 승용차는 총리 관저에 도착했고, 경호원에게 총격을 가한 후 총리 관저를 습격했다.
이후 총리 관저 습격조는 앞문조와 뒷문조로 갈라졌고, 마침내 식사 중인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를 찾아냈다.
해군 장교들은 이누카이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었으나,
이 사단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장교들의 위협에도 이누카이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단을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이누카이는 태연하게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고,
관저를 습격한 장교들을 '젊은이'라 부르며 격식 있게 일본의 장래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미카미 다쿠 등은 점점 이누카이의 말에 집중했고, 이누카이와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분위기를 일순간 깨뜨린 외침이 터졌다.
문답무용 쏴라!
야마기시 히로시 등의 외침에 놀란 구로이와 이사무는 이누카이의 좌측 두부를 총격했고,
그러자 역시 놀란 미카미 다쿠 역시 이누카이의 우측 두부에 총격을 가했다.
이후 총리 관저 습격조는 도망쳤고, 이누카이 츠요시 내각총리대신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 젊은이들을 다시 불러오거라. 잘 이야기해보겠다.'
5.15 사건의 피의자들이 설정한 타겟은 다음과 같았다.
총리 관저-이누카이 츠요시 내각총리대신
입헌정우회 본관-입헌정우회의 주요 정치인
입헌민정당 본관-입헌민정당의 주요 정치인
내대신 관저-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그 외-경시청,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이누카이 다케루 총리 비서, 배우 찰리 채플린
이 중 이런저런 이유로 총리 관저 습격에만 성공했고,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와 총리 관저를 지키던 경호원 한명이 사망했다.
실제로 사람이 죽었음에도 혈맹단 사건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일본의 사법부는 이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그나마 군인 신분이 아니었던 세명의 경우 각각 무기징역, 징역 15년, 징역 13년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군인 신분이었던 해군 장교들과 육군 사관생도들은 군법재판으로 넘어가며 이보다 훨씬 낮은 징역을 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군부와 민중의 구명운동과 서명운동으로 인해 피의자 전원은 형량을 다 안채우고 조기 석방되었다.
이미 대중적으로도 타락한 정치권에 대한 혐오감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는 군부를 혐오했던 경향을 뒤집고 민중의 군부 지지, 즉 극우화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당정치는 무력화되었다. 그러니 정당 내각의 존속 자체도 의미가 없어졌다.
1932년 5월 16일,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임시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정계는 군부의 위협 속에서 정국을 수습하려 고민했고,
결국 다카하시 임시내각이 임기를 끝마침과 동시에, 해군 조약파의 상징
사이토 마코토가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메이지 유신으로 이룩한 근대화와 법제도의 개편,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았고,
일본은 다시 무력이 정치를 좌우하는 막말유신기의 분위기로 퇴행했다.
에도 막부를 무너트리며 건설된 대일본제국은 그 내부에 거국주의 내각이라는 막부를 설치한 꼴이 되어갔고,
그렇게 일본이 자랑했던 메이지 문명의 찬란했던 영광은 멸망했다.
'일본 근현대사 > 전전 쇼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풍전야, 이누카이 내각의 출범과 한계 (0) | 2025.04.23 |
---|---|
혈맹단 사건으로 드러난 비문명적 사법체계 (0) | 2025.04.22 |
통제파와 황도파, 일본 육군이 지닌 정치에 대한 관점 (0) | 2025.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