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오카다 내각, 황도파-통제파 간의 갈등

2025. 6. 11. 16:49·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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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귀족 원로로서 추밀원과 귀족원을 주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의 입장에서

5.15 사건은 최악의 경우의 수이자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정당 내각 중심의 정치는 이제 무력 앞에 위태로워졌음이 확인된 것이었고,

적어도 이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군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정당 중심의 정치를 중단시켜야 했다.

실제로 5.15 사건 다음 날인 1932년(쇼와7) 5월 16일, 내대신 비서관장 기도 고이치는 사이온지에게 '시국수습대강'을 제출했고

사이온지는 일단 기도의 의견대로 거국일치 내각의 수립을 결정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새워질 새로운 내각의 주축이 누가 되냐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면 입헌정우회의 새로운 총재가 된 스즈키 기사부로가 내각총리대신에 오름이 마땅하나

이렇게 될 시 육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실정이었다.

일단 육군 내에서는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에 히라누마 기이치로 부 추밀원장을 옹립하고

나가타 데쓰잔, 아라키 사다오, 스즈키 데이이치 등 육군 관료 들을 입각시켜 내각을 구성시키라고 요구해왔다.

그리고 육군은 이러한 내각 수립안에 호응하지 않을 시 육군대신을 공석으로 만드는 등,

어떻게 해서든 정당 내각의 출범을 좌절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할 작정이었다.

 

5.15 사건으로 총리가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군부를 달래기 위해 군부의 의견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일본 근대 정치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당도했던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사이온지는 이런 정국이었기에 평소와 달리 총리 선임에 있어 다양한 인물의 조언을 들으려 애썼다.

구라토미 유사부로, 마키노 노부아키 등 추밀원 귀족들은 물론이고

이미 정무 일선에서 멀어져 있던 전 육군 원수 우에하라 유사쿠, 전 해군 원수 도고 헤이하치로 등과도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사이온지는 기존의 계획이었던 스즈키 기사부로 중심의 거국일치 내각 설립안을 페기했고

그 대신 조선총독으로 있던 해군 원로이자 전 해군대신, 그리고 해군 조약파의 상징격 인물인

사이토 마코토를 차기 총리에 내정했다.

 

군부의 반발과 정치인에 대한 반감을 사이토라는 군인 정치인을 이용해 미봉하려는 생각이었고

이렇게만 본다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아리디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제대로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가 조선 총독 등등을 장기간 역임하며 일본 국내에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오카다 게이스케 등 동료도 없지 않았고 애초에 조약파의 상징인 인물이었다.

다만 조약파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군축 정책에 있어서는 우가키를 연상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부패한 정치인을 충성스러운 군인으로 대체한다'는 식의 대안이라면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이 즈음에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으로 있기는 했지만 5.15 사건 정후 정국에 대한 책임으로 사실상 배제되기 시작했고

황도파와 통제파 간의 권력 다툼이 본격화되었기에

어쩌면 육군을 제어할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편 사이토 내각은 육군의 만몽 진출 의지에는 호응해주었다.

뤼튼 조사단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 철수를 명령했으나,

내각은 이를 무시한 채 만주국과 일만의정서를 체결했으며, 일본을 시작으로 여러나라가 만주국 건국을 승인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는 국제연맹의 거친 반발을 샀고, 일본은 이에 대해 국제연맹 탈퇴로 응답했다.

그리고 결국 1934년(쇼와9) 만주국이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육군의 의지에 호응하여 그들의 불만을 제어한다'는 식의 방법은 옳았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애초에 5.15 사건 가담자들부터 큰 처벌을 받지 않았기에, 애국심을 근간으로 행동하는 강경파 군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사라졌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견에 배격되는 인물을 일종의 역적으로 여기며 제거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적극 행동은 얼마 안가 현실화되었다.

 

1933년(쇼와8) 신병대사건(사관학교사건)이 일어났다.

5.15사건 가담자와 국가주의 인사들, 그리고 장교 후보생들이 주축이 되어 내각, 귀족, 정당 정치인을 암살할 음모로

사전에 발각되었지만 만약 시행되었으면 국회의사당과 총리관저 등에 폭탄이 투하될 예정이었다.

물론 가담자들은 전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정직 및 퇴교 조치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육군과 경찰이 갈등 끝에 육군이 경찰보다 서열 우위에 섬을 확정한 고스톱 사건,

국가를 위하여 사상 탄압을 위해 교토 대학을 침공한 다키가와 사건 등,

육군의 만행은 제어되기는 커녕 확장되어갈 기미만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1934년 문부대신 하토야마 이치로와 구 스즈키 상점의 계열사였던 제국인조견사주식회사(제인)간의 유착 관게가 포착되며

군부는 거국일치 내각임에도 타락이 유지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같은 해 사이토 내각은 붕괴되었고, 후임 총리에 해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카다 게이스케가 내정되었다. 

나가타 데쓰잔

사이토 내각,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오카다 내각은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을 이용해 육군을 제어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선봉으로 월경장군이 되어 육군 내에 명망이 뫂앗던 전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를 중용했다.

하야시 센주로는 나가타 데쓰잔을 적극 기용하여 군을 통제했고,

이는 결국 황도파의 수장인 마사키 진자부로와 통제파의 수장인 나가타 데쓰잔 간의 알력 싸움으로 확대되어갔다.

결국 황도파와 통제파의 권력 다툼 끝에 마사키 진자부로 당시 교육총감은

나가타 데쓰잔 당시 군무국장에 의해 경질되었으며, 이로 인해 황도파의 입지는 크게 손상되었다.

 

황도파는 이러한 통제파 역시 귀족, 관료, 정당 정치인과 동일한 '국가에 방해가 되는 제거대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마사키 진자부로가 경질되며 입지에 큰 타격이 왔음은 황도파에게 있어 그들의 사상에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받아들여졌다.

특히 황도파 사상에 제대로 빠져든 젊은 장교들은 마사키의 경질로 또 천주를 모의했고,

그 대상은 통제파의 수장이엇던 나가타 데쓰잔이었다.

 

1935년 8월 12일 황도파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 의해 나가타 데쓰잔 육군 중장이 살해당했다.

(아이자와 사건 혹은 나가타 사건이라 한다)

아이자와 사부로에 대해서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지만, 이 역시도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으로 판결에 꽤 시간이 걸렸고,

결국 1936년 7월 아이자와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황도파의 입지는 통제파와의 정치 싸움 끝에 상당히 약해졌고

여기에 더해 귀족, 관료, 정당 정치인, 온건파, 아니 그냥 황도파가 아닌 모든 집단에 대해 불만을 폭발시키려했다.

 

1936년(쇼와11)

일본은 밖으로는 만봉을 향한 급격하고 갑작스러운 확장을 진행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불만을 무시하려 애쓰고 있었고,

안으로는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 속 그 무엇도 육군을 제어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하는 형국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5.15사건으로 이누카이 츠요시가 죽었음에도 그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시대는 1935년 2월 26을 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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