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과 정당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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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1931년(쇼와6)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출범했고, 하마구치 내각의 시기와 와카츠키 내각의 시대를 합쳐서 생각해봤을 때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총리로 짬을 맞고만 살았다고 생각한다.1차 와카츠키 내각은 2차 호헌운동 이후 입헌민정당(당시에는 헌정회)과 입헌정우회 간 경쟁 구도에가토 총리 병사+다이쇼 덴노 붕어+쇼와대공황이라는 3콤보가 닥쳐왔던 상태였다.그리고 그 난관 속에서 귀족원이 작정하고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를 밀어주면서 붕괴했다. 2차 와카츠키 내각도 비슷했다.황구툰 사건+대공황+군축 논의라는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며 내각을 괴롭혀왔는데,육군은 육군대로, 입헌정우회는 입헌정우회대로 비협조적이었고,결국 만주사변이라는 괴상한 참사를 맞닥뜨려야 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2차 와카츠키 내각을 지원해줄 기반이 ..
시데하라 기주로의 협조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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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한일합방과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관련된 인물을 제외하고, 일본 근현대 인물 중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구된 인물은아마 이 시데하라 기주로가 아닐까 생각한다.시데하라 외교, 혹은 대중국 협조 외교 노선이라 불리는 1920년대 후반 일본의 외교 정책 방향성을 확립한 인물이며,이 인물의 외교 노선은 2.26 사건 이후 군부 주도의 외교 노선과 비교되었고,외무대신 임기 이후 재야에서 이를 비판하고 분석했으며, 전후에는 총리에 올라 평화헌법의 기초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중 협조 외교에 대한 것만 보도록 하자. 시데하라 기주로는 중국으로의 제국주의 진출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실제로 그간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이권을 더 차지하려다가 견제를 받아 실..
우가키 군축과 통수권 우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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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해금과 본격적인 군축 정책1929년(쇼와4)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제국의회 중의원을 장악하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대표 하마구치 오사치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분명 정우회와 민정당, 두 정당 간의 의mtw31082.tistory.com여기서 군축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해군에 대한 것, 즉 런던 군축 조약에 대해서만 언급했다.이렇게만 보면 육군은 빗겨나간 것 같은데, 사실 육군도 해군에 준하는, 어쩌면 더한 군축이 가해졌다.근데 이걸 왜 저기서는 언급 안했냐? 육군에 대한 군축, 즉 우가키 군축이 꽤 중요해서 그렇다.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일본의 육군 정치인과 조선 총독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좋게 평가하는 편인 인물이다.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유를 설명하자면육군 출신 정치인..
금 해금과 본격적인 군축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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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1929년(쇼와4)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제국의회 중의원을 장악하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대표 하마구치 오사치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분명 정우회와 민정당, 두 정당 간의 의석 수는 2석 차이로 정우회가 우위를 점했는데,약 1년 여 기간 동안 민정당에 수많은 의원들이 합류한 건지, 제국의회 제1당이 입헌민정당으로 교체되었다.이거 왜 그런건지 나름 찾아봤는데 자료를 못찾았다. 황구툰 사건 이후의 혼란은 총리가 바뀐 이후에 바로 잠잠해진 게 아니었다.봉천군벌은 국민정부와 힘을 합친 후 소련으로부터 이권을 회복하려했고,마침 소련도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 방면에 대한 이권을 복구하려 노력하기 시작했기에, 양측은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봉소전쟁)한편 11월에는 광주의 학생들이 차별과 하대에 대해 불만..
관동군의 무책임한 자율성과 황구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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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관동주 관동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삼국간섭과 아관파천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mtw31082.tistory.com내가 역사 과외를 하던 시절, 일종의 흐름을 이해시키기 위해 현 체제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를 강조했는데,그 중 하나가 바로"중앙 정부의 권력과 통제력이 영토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었다.물론 이것은 전통시대에 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실 몇몇 국가에서는 정세 불안과 함께 지방 재현되는 현상이며,전통시대에 중앙의 권력을 지방까지 통용시킨 유일한 국가는 로마제국뿐이라 해도 될 정도로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시대에 ..
광인(狂人) 기타 잇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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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일본에서 국가주의를 정치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영향을 주었다.낭인회, 흑룡회 등에서 활동하며 국체를 우선시했던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해외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국가주의적 사회 혁명을 꿈꾼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루그리고 국학과 불교(일련종) 교리를 기반으로 덴노 중심의 국가주의를 주장한 다나카 지가쿠, 이노우에 닛쇼 이 중 가장 논리성이 좋았던 것은 세번째, 국학과 불교 교리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한 국가주의였다.다나카 지가쿠는 일련종 신자였고, 국학과 일련종이라는 일상적인 논지를 기반으로국가주의에 대한 논리를 설파해 나갔다.그의 영향은 거의 모든 국가주의 사상가에게 퍼졌고, 특히 일련종 승려였던 이노우에 닛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비교적 덜 주목..
광인(狂人) 기타 잇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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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광인(狂人) 기타 잇키 1다이쇼 초반기의 국가주의메이지 후반의 정치 분위기시간을 조금 돌려서 메이지 후반부의 정치 이야기를 해보겠다.1900년대 초반 일본의 정계는 네개의 파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겠다.하나는 초mtw31082.tistory.com기타 잇키의 사상에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포용적인 성향이 함축되어있다.1901년(메이지34) 기타가 고향에서 도쿄로 상경했을 때만해도 그는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와 교류하던 사회주의자였고,이후 법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등을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 단체인 흑룡회와 교류했으며,몇년 후에는 흑룡회를 통해 중화민국의 인사들과 교류하더니 아예 중국으로 넘어가서 활동하기도 했다.중국에서는 쑹자오런, 쑨원 등 신해혁명의 주역들과 교류했고,원래 '데루지로(..
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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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3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2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mtw31082.tistory.com비록 7석에 불과했지만, 이러한 성과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이를 농민과 노동자 두 가지 방향성에 서술해보겠다.라고 말하니 정말 빨갱이 같네..주제가 그런 주제니까. 우선 농민의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소작료였다.생산 작물의 70~80%에 달하는 과도한 소작료가 문제였고,여기에 더해 1차대전 이후 폭등한 쌀값으로 소작농이 생산한 쌀임에도 소작농의 노동에 대한 댓가로 구매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했다.그래서 그 돈 아껴서 자영농으로 발전한다는 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시대..
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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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2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mtw31082.tistory.com무산정당(無産政党)기독교 사회주의와 각종 노동조합,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들이 혼재하여 탄생한 이 단체의 기본 방향성은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있어 과격파인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을 배격하고현실적인 방법(선거)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사회주의적 이상(ex: 노조 합법화)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적 이상이 문제였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설정하고 실현해 나감에 있어1926년(다이쇼15) 3월에 창당된 노동농민당 내에서 다양한 이견이 갈렸다.특히 자신의 활동에 장애..
쇼와로 이어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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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저번 글이 중국이야기였고, 마지막을 관동군으로 끝냈으니 이제 나올 건 황구툰 사건이겠지만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3년 임기 동안 많은 일이 있었기에, 이걸 언급하긴 해야한다.그러니 황구툰은 마지막으로 미루고 이 시기의 일본 내부적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황구툰 사건 언급하고 끝내면 인과관계가 안맞을 정도로 광기에 휩싸이니 일단 다른 이야기를 우선하자면일단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시기는 1926년의 대공황과 1929년 뉴욕의 '암흑의 월요일' 사이의 기간이라서다이쇼의 마지막 중흥기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다이쇼 로망으로 인한 수혜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고방법이 그래서 그렇지 이때 대공황은 나름 순조롭게 미봉시킨 편이기도 했다.근데 문제가 하필 총리가 다나카 기이치라 그렇지.어쩌면 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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