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다이쇼7) 중순, 1차 세계대전은 협상국의 승리로 점차 전황이 굳어져갔다.
비록 서부전선은 문제가 없었지만 동부전선은 이미 구멍이 난 상태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빠졌다지만 독일은 심각한 식량난으로 순무만 먹고 겨울을 버티는 등
이제 이길 여력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상태였다.
1918년 10월 24일 독일 제2제국 빌헬름 2세는 향후 종전 협상에서 그나마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해군에 영국 본토 공습을 명령했다.
참고로 이때 동맹국 중 불가리아는 항복, 오스만 튀르크 제국도 협상국에 항복할 것을 확정지은 상태였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각종 반란에 시달리던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보급도 제대로 못받던 군대에게 돌격 명령은 그냥 죽으라는 뜻이었고,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런 상황까지 가면 통제력이 제대로 될리가 없다.
10월 29일 빌헬름스하펜에서 수병들이 대거 탈영했고, 이것이 진정되지 않으며 독일 대양함대가 머물던 킬 항구로 확장되었다.
킬 항구의 수병 반란은 결국 독일 11월 혁명으로 이어졌고, 11월 9일 빌헬름 2세는 퇴위를 선언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1월 11일 독일에 새롭게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콩피에뉴에서 협상국과 휴전협정을 맺었고,
이때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항복한 상태였기에, 그렇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었다.
협상국을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들은 파리에 모여 전후 세계정세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유럽 협상국의 핵심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국가원수들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의 핵심은 독일 제2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대한 영토 분할과 전쟁 배상금,
신생국에 대한 처분 및 정리 등이었다.
독일은 폴란드와 보헤미아 일대를 상실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소련도 동유럽 일대의 영토를 상실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폴란드, 발트3국, 유고슬라비아 등의 신생국이 등장했다.
그 외에도 남티롤(쥐트티롤)이 이탈리아령으로 편입되었고, 보불전쟁의 전리품인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령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이 두 지역은 지금도 각각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토이다.
칭다오 전투 등 독일과의 전부에 참여했던 일본 역시 승전국의 자격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대일본제국 대표로는 사이온지 긴모치가 참여했으며,
부사에 마키노 노부아키 전 외무대신, 친다 스데키 주영 일본대사, 마츠이 게이시로 주불 일본대사가 대동했다.
여기에 각종 수행원이 따랐으며, 공가인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당시 고셋케 최고의 엘리트
고노에 후미마로가 마키노 노부아키의 수행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일본은 그래도 승전국이었기에 舊독일령에 대한 분할, 배상금 등에 있어서는 이득을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남양군도로,
국제연맹은 '적도 이북에 위치한 태평양의 독일 영토에 대한 위임통치령'을 설치했고, 그곳의 위임통치를 일본에 맡겼다.
물론 위임통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했지만, 국제연맹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의미있는 조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1920년(다이쇼9)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 중 일부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창설된다.
일본은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 지정되었고, 초대 국제연맹 상임이사에 메가타 다네타로가 파견된다.
대한제국 화폐정리사업 할 때 나오는 그 재정고문 메가타이다.
참고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인데
보다시피 미국이 없다. 물론 소련도 없다. 이 두나라는 상임이사국뿐 아니라 국제연맹 자체에 가입을 안했다.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이유로 국회에서 국제연맹 가입이 통과되지 못했고,
소련은 1차대전에서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해 이때는 가입하지 못했다.
대체 ㅅㅂ 이거 왜 있는 거지?
여담으로 소련은 나중에 가입했다. 가입하자마자 상임이사국으로 지정되었는데, 이거 사실 일본때문이다.
남양군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이게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받은 유이한 대우라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은 권한보다는 돈을 더내야하는 의무만이 강조되는 자리이기에
사실상 일본에 들어온 것은 남양군도 위임통치령 하나뿐이었다.
그 모든 원인은 여기에 기인한다.
21개조 요구안
1914년(다이쇼3) 6월 28일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란치프가 쏜 총알이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부인을 향했고,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mtw31082.tistory.com
한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너무 설쳤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과도하게 성장했다고 파악했고,
그 이전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 어떤 나라도 독점하지 않은 중국을 대놓고 독점하려 해 거의 노골적으로 일본은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잘 알려진대로, 21개조 요구안은 폐기되었으며, 이시이-랜싱 밀약도 폐기되었다.
비록 중국의 요청보다는 일본의 요청이 훨씬 더 받아들여졌지만,
일본의 요구안을 묵살시키는 이러한 행보는 오히려 일본에 거부감을 들게 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 도중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안으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인종차별금지를 제안했으나
유럽 국가들에 의해 무난히 무시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과도한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반서방주의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다이쇼10) 1차 세계대전 승전국끼리 향후 세계 정세를 논의하려 워싱턴 D.C.에 각국대표가 집결하며 워싱턴회의가 개최되었다.
워싱턴회의의 주요 내용은 사실 군축이었지만, 전반적으로 워싱턴회의는 일본을 견제하는 성격도 동반되었다.
워싱턴회의의 결과로 4개국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미영불이 주도하는 태평양 안전체제를 작동시킴과 동시에 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일본의 특수한 이권 역시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 대신 영일동맹이 폐기되었고(만기인 1921년을 끝으로 연장하지 않게 되었음),
일본은 향후 강제적으로 군축 논의에 참여 및 군축 시행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일본은 세계적으로 군축을 도모하는 워싱턴체제 속으로 흡수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 정세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지역에 식민지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끼리
전쟁만 안하면 안전한 것 아닌가?
그리고 중국이라는 저 큰 땅덩어리를 삼키려는 게 괘씸하기도 하지만,
독일이 몰락한 와중에 향후 전쟁할 여지도 없어보이는데, 굳이 일본을 더 지원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중국 군벌 간 내전을 관찰하면서 일미영불끼리 이권 조정이나 하는게 맞지 않을까?
소련은 적백내전으로 여유도 없는데, 얘네 견제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틀린 논리는 아니다. 다만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 시각에서 본다면
그저 완벽하게 틀렸을 뿐이다.
'일본 근현대사 > 다이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정세변화와 민족자결주의 (0) | 2025.02.13 |
---|---|
폭풍 속의 하라 내각 (0) | 2025.02.12 |
데라우치 내각의 실책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