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이후의 중국 정세는 혼란과 모순 그 자체였다.
신해혁명으로 청은 황실의 특권만 유지된 채 멸망했고, 그 권력은 위안스카이에게 그대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것이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었고, 위안스카이는 점차 중화민국의 모든 권한을 독점했다.
중화민국은 시민혁명과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했지만 그 정신은 금세 훼손되었고
1913년(다이쇼2) 쑨원은 제2의 신해혁명을 준비했지만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모든 정치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이를 유지시키기 위해 군벌을 대거 육성했으며,
21개조 요구안 이후 흔들리는 자신의 입지를 수호하기 위해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개칭하고, 형식적 독재정이 아닌 공식적인 전제군주정을 도입했다.
그렇게 모든 권력이 위안스카이로 집중되었지만 얼마 안가 위안스카이가 죽었고,
전제군주정인 홍헌체제가 폐지되고 중화민국으로 복고되었지만, 그 형식적 독재정은 유지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독재적 권력을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은 돤치루이였다.
1913년의 제2혁명이 실패한 후 쑨원은 그대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길에서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조직했고,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주요 인사와 교류하기도 했다.
1918년(다이쇼7)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왔고, 돤치루이 정권에 대항하는 정권을 광동성 일대에 건설했다.
그렇게 중국은 베이징의 북양정부(돤치루이)와 광저우의 호법정부(쑨원)으로 분할된 것이다.
호법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중국의 대표로 인정받으려 했고
니시하라 차관 등 돤치루이 정권의 반민족적 행태를 비난하며 정치적 목소리를 높혔다.
이러한 중국의 정세 변화 속에서,
동아시아에 민족주의적 정서를 촉발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파리 강화 회의 중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독일 제2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소수민족에 대해
민족 스스로의 운명은 그 민족이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했다.
이 의견은 잘 알려진대로 발칸반도 국가에 대한 것이었고, 여기에 더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함이었는데
효과가 여기서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1919년(다이쇼8) 1월 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승하했다.
고종의 사인과 관련해 매우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되었고, 이는 조선 내외에서 확대되고 있던 조선 독립운동을 자극했다.
게다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운명은 일본이 아닌 조선이 결정해야함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터지고 만 것이었다.
시위는 금세 전국적으로 퍼졌고, 야마가타파 출신인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은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려했지만
사실상 역부족이었다. 3.1운동이 완전히 진압되는 데에는 약 1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 내에서도 조선 통치 정책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문제가 된 점은, 이 사건이 3.1운동 진압 도중있었던 '기독교도 학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입막음을 잘했으면 몰라. 당시 조선에 와있던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제암리 사건을 전세계에 알렸고
그렇게 아시아 유일의 문명개화국의 이미지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의 기독교도들은 분노하며 하세가와 총독을 비난했고, 결국 3.1운동에 대한 책임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이 퇴임했다.
(참고로 하라 다카시도 기독교도였지만 제암리 학살 사건 관련 언급은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운동은 조선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교과서에 나오듯 3.1운동은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있어 시발점이었고,
3.1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안되어 중국에서도 북양정부와 21개조 요구안 및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로 5.4운동이 발발했다.
그 중심에는 천두슈 등의 지식인들이 있었고,
당시 상하이에서 혁명세력을 정비 중이었던 쑨원도 5.4운동에 대해 공식적인 지지를 표했다.
5.4운동으로 북양정부의 입지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 1920년(다이쇼9) 우페이푸가 북양정부로부터 독립해 직예군벌을 세워버렸다.
북양정부를 장악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직예군벌은 그대로 전쟁을 시작했는데,
당시 안휘군벌은 전투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1차 안직전쟁은 직예군벌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돤치루이는 도망쳤고, 결국 생존을 위해 쑨원과 손을 잡는 선택을 하게 된다.
글을 쓰다보니 일본사가 아니라 중국사 이야기가 되어가는데, 중국사 부분은 이제 최소화하고
일본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선술했듯 1919년 3.1운동에 대한 책임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이 사임했다.
그리고 차기 조선총독으로 해군대신을 역임한 사쓰마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었다.
첫 해군출신 총독. 이는 어쩌면 식민지 통치정책이 전환되는 신호탄이었다.
1919년 대만총독 아카시 모토지로는 대만 주둔군 사령관에게 대만의 군사권을 일임시키고
대만총독부는 행정적 역할에 집중하는 식으로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여기에 더해 같은 해, 조선총독과 대만총독에 대해 문관총독 임용을 허가했고, 얼마 안가 덴 겐지로가 대만총독으로 부임했다.
교과서에 나오듯 조선총독에는 문관총독이 임명된 적이 없다.
하지만 대만총독은 역대 유일한 문관총독인 덴 겐지로가 이때 부임했고, 아무튼 이런 식으로 최소한의 시늉은 일본이 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행보였다.
사이토는 기존의 무단통치 노선을 완전히 폐기했다.
조선 헌병경찰제가 폐지되었고, 태형 등의 후진적 대우가 폐지되었다.
회사령과 어업령 등 조선에 대해서만 과도했던 허가제들도 신고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가 실질적인 의미가 컸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이런 것도 안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이토 마코토는 친일파라도 조선인 인사들의 의견을 듣기 시작했고, 지방 공무원 등에 조선인 임용을 도입하기도 했다.
사이토 마코토가 초연주의 번벌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야마가타파에 비하면 온건한 인물이기는 했으며,
이러한 면모는 이후 시대에 더욱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문화통치로의 전환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유화적인 식민지 통치 정책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일말의 편의조차 봐주지 않으며 탄압했던 무단통치와 달리
문화통치 기간에는 일본의 편의와 필요를 위해 식민지에 일종의 호의를 베푸는 식의 조치가 있었으며,
그렇다고 너무 기어오를 때를 대비한 것인지, 치안유지법은 이례적으로 일본에 도입되자마자 식민지에서도 사용되었다.
일본은 이후에도 식민지에 대한 나름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다가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전쟁 준비에 대한 수요로 이를 폐기하게 된다.
즉, 대충 15년 동안은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의미는 없었지만 말이다.
'일본 근현대사 > 다이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쇼 초반기의 국가주의 (0) | 2025.02.13 |
---|---|
세계적 군축의 시작과 일본의 입지 (0) | 2025.02.12 |
폭풍 속의 하라 내각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