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메이지29) 새로운 총리에 오른 것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
마쓰카타는 1892년(메이지25)의 선거간섭 이후 이토 히로부미 와는 정치적으로 척을 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내각에 이토파 혹은 이토 내각의 관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전임 내각이 2차 이토 내각이 아닌, 구로다 임시 내각이었기에
2차 마쓰카타 내각에는 2차 이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유임되었지만
전부 며칠 내로 교체되었다.
예를 들자면
외무대신과 문부대신을 겸임하던 사이온지 긴모치는
외무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 문부대신에는 하치스카 모토아키가,
내무대신은 이토가 영입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대신 가바야마 스케노리 전 대만총독이,
육군대신은 오랜 기간 육군대신을 역임했던 오야마 이와오 대신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
사법대신에는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정되었다.(더 있지만 이하 생략)
새롭게 국무대신에 임명된 인물들에 대해 그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체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이토파 배제의 향기가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경우 자유민권운동의 반향을 약화시키기 위해 내각에 영입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이토의 정책에 우호적이었음이 예상가능했고,
이 부분을 완전히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민권파의 중역이자 이타가키와 거리가 있는 인사를 영입해야 했다.
새로운 외무대신으로 내정된 오쿠마 시게노부의 이름이 눈에 띄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당시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던 두 정당인, 이타가키의 자유당과 오쿠마의 진보당은
대동단결운동 이후 일종의 노선 차이를 뚜렷히 보이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토에 붙은 이타가키를 견제할 겸 민권파의 저항도 약화시킬 목적으로 오쿠마가 영입된 것이라 보면 된다.
이로 인해 2차 마쓰카타 내각은 마쓰카타(松方)와 오쿠마(大隈)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온'쇼와이 내각(松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외로 이러한 2차 마쓰카타 내각의 인사에 대해 불만을 보인 건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야마가타는 원래 새로운 육군대신에 조슈 출신 야마가타파 인사인 가쓰라 다로를 내정하길 원했고,
실제로 육군은 조슈번 출신이 장악했기에 문제가 없어보였다.
가쓰라 다로 역시 이를 예상해 대만 총독직을 사임해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후임 육군대신에 사쓰마번 출신인 다카시마 도모노스케가 내정되었던 것이었다. 가쓰라 다로는 그렇게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사쓰마번 출신인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내각총리대신이어서 그랬을까?
내각 내에 조슈 출신은 체신대신 노무라 야스시 단 한명뿐이었다.
즉 이미 2차 마쓰카타 내각의 적은 이토파만 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값졌다.
국제적/외교적 효과는 후술하고, 그 배상금 면만 생각하더라도 국가예산 몇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게다가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비록 요동반도는 잃었지만 그 댓가로 배상금이 추가되었다.
2차 마쓰카타 내각은 66함대계획을 발표했는데, 1896년부터 6척의 군함을 증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청일전쟁 배상금을 기반으로 산업과 군사면에서의 발전을 도모한 메이지 정부였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전후 공황이었다.
경제 관료 두명이(오쿠마, 마쓰카타) 내각에 포함되었음에도 국가 재정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대로면 66계획은 필연적으로 폐기해야했다.
66계획이 폐기되면 사쓰마번 출신이 중심이 된 해군을 밀어준다는 계획은 무산될 것이며,
동시에 사쓰마번사들과 해군으로부터의 반발을 야기할 것이었다.
다시 전쟁을 해서 경제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미봉책에 불과하기도 했지만 상대는 하필 러시아인 게 컸다.
1897년(메이지30) 2차 마쓰카타 내각은 각의에서 지조증징을 제안했다.
지조개정 당시에도 이미 이에 대한 농민의 부담이 커 그 반발이 심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 농민의 수가 줄어들었다지만 공황이 심해지는 가운데 그 부담을 농민에게 짊어지게 하는 건
누가 봐도 멀쩡한 정책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이런 식의 정책은 곧 민권파의 저항을 샀는데, 하필 민권파 중 지조증징에 반대한 게 진보당이었던 게 문제였다.
결국 1897년 11월 진보당 당수 오쿠마 시게노부가 지조증징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외무대신직을 사임했다.
마쓰카타 총리는 이러한 정국을 타파함과 동시에 지조증징안을 통과시키려 국회를 해산시켰으나
오히려 그 역풍만 불 뿐이었다.
민권파의 반발은 물론 이토와 야마가타도 내각을 비판했고, 결국 2차 마쓰카타 내각은 붕괴했다.
2차 마쓰카타 내각의 행적을 이토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냥 2차 이토 내각의 파쿠리 정도 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기세등등하게 세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한 이토 히로부미였으나
현실은 녹록치않았다.
추밀원은 야마가타파가 장악해 내각 조성에 있어 자신의 의견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권파가 장악한 국회로 인해 뭘 하려해도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래도 이토 히로부미는 지조증징 문제를 이용해 자유당을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으나
대장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이를 격하게 반대했고,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이래저래 한계만 부딪혀 별 실권이 없던 이토는 현실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까?
자주 언급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감각은 일본 역사 GOAT이다.
짤리게 생기니 계엄령 선포하는 머저리들이랑은 클라스가 달랐기에, 그런 이토의 머리에서는 이런 발상이 나왔다.
창당할까?
이토의 창당 계획은 자유당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유당이 진보당과 합당해 헌정당을 만들면서 무산되었다.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토의 창당 구상은 분명 정국에 영향을 주었고,
오히려 제국의회가 헌정당 1당체제로 굳어버리니 이토 입장에서도 노선이 확실해지기도 했다.
3차 이토 내각은 약 5개월만에 붕괴되었고, 이토는 헌정당에 정권을 줘버렸지만
이 선택은 이토 본인에게는 득이 되었고, 헌정당은 약 5개월 간의 짧은 전성기로 해산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토는 3차 이토 내각의 해산만으로 창당 구상을 접은 게 애초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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