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해권 장악은 순탄하게 이루어질 일이었다.
물론 변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이 카를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와 교류하고, 이완용 등 친러파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있다지만
외교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는 협상이 가능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1894년(메이지27) 청일전쟁이 한참이던 상황에서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가 붕어했다.
그리고 오쓰에서 칼에 맞았던 니콜라이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
오쓰 사건의 앙금이 남지는 않았기에 러일 양측의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1896년(메이지29) 니콜라이 황태자 즉위식에 일본 대표로 참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즉위식 후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 로스토프스키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해 러시아는 묵인한다는 밀약을 맺기도 했다.
이를 야마가타-로마노프 각서(혹은 먀아가타-로마노프 밀약)이라고 한다.
니콜라이 2세는 취임 직후 부친의 평화주의 외교정책을 뒤집었다.
팽창주의로 선회하며 영국과이 그레이트 게임을 재개하려 했고,
이러한 노선은 빌헬름 2세의 독일제국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빌헬름 2세 역시 조부의 중립외교 노선을 폐기했고,
이를 위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중립외교의 핵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사임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비스마르크 외교의 피해자로, 외교적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위한 차관 도입 등 러시아에 접촉했던
프랑스까지 러시아와 접촉했다.
삼제동맹 붕괴 이후 긴장을 기반으로 한 유럽의 평화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팽창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고 해서 곧바로 영국과의 전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그 많은 조약을 위반해가며 페르시아와 발칸반도 방면으로 진군하기는 힘들었고,
당연히 이를 대신할 선택지는 동아시아였다.
그리고 이러한 타이밍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고,
만주로의 진출을 추진하던 러시아에게 요동반도의 일본 할양은 곧 전쟁하자는 거나 다름 없었다.
1895년(메이지28) 4월 8일, 러시아는 '일본의 뤼순 점령이 청일 양국의 영구한 평화를 해칠까 우려된다'라며 항의했다.
말이 평화 어쩌구인거지 외교식 어휘를 풀어 해석하면 그냥 '하지마'였다.
당연히 일본이 이를 들을 리가 없었고, 1895년 4월 23일,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이를 행동에 나섰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주일 공사는 모여 외무성에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해 항의하는 각서를 제출했다.
당시 시모노세키 조약의 비준 및 재가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은 물론,
병을 이유로 휴직 중인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이 모두 부재중이었기에
외무차관인 하야시 다다스가 러불독 3국의 공사를 응접했다.
그리고 그 항의 각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삼국 각각의 항의 각서에 내용 차이는 있었지만 대충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는 곧 조선의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에 지장을 줄 것이니 철회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 공사의 항의 각서에는
'일본이 위 삼국과 전쟁을 하더라도 (일본은) 승산이 없으니, 이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본에게도 좋은 것'
이라는 과감하고 직설적인 협박까지 전했다.
당연히 일본 정계는 분노했다.
그렇기에 상책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과의 전쟁이었으나, 독일 공사의 각서대로 삼국 모두와의 전쟁은 승산이 없었다.
그러자 제시된 것이 즉각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승전국에 어울리지 못한 행동이었으며, 민당의 과격한 항의를 직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청과의 추가협상을 진행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대신 배상금을 더 받는 식으로 삼국간섭에 응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당연하게도 민권파는 분노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이자 청일전쟁의 승전국임에도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비난했고,
결국 얼마 안가 2차 이토 내각은 총사임했다.
하지만 2차 이토 내각은 총사임 이전 나름 최선의 조치를 진행하고 갔다.
우선 하나는 조선 문제였다.
청일전쟁 중 이노우에 가오루에 의해 갑오개혁이 단행되었고, 1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중 흥선대원군이 청에 호응하라 한 것이 평양성 전투를 통해 밝혀지며 흥선대원군은 퇴진했고,
그 대신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와 서광범을 이용해 2차 김홍집 내각(김홍집-박영효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달리 일본 생활에 모범적이었던 인물이고(사건사고 없이 일본에서 나름 잘 지냈다는 뜻)
내각에서 김홍집을 꼭두각시로 만들며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명성황후는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박영효에게 역모죄를 물어 실각시켰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조선의 정치적 교류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친일파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꼈던 친러파 관료들이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집결한 상태였다.
일본은 결국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를 귀국시키고 미우라 고로를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파견했다.
그 이후에는 다들 잘 알듯,
일본군은 친러파 와해 및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만행은 저질렀다.
을미사변은 을미개혁의 무산과 조선 내의 반일감정을 확대시키는 역효과만 일으켰다.
경제적인 이유로 나타나던 반일감정은 민족적 감정으로 확장되었고, 이러한 반일감정은 대중을 넘어 왕실까지 이어졌다.
1895년 고종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친미파 관료들을 기반으로 춘생문을 나가 미국 공사관으로 숨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고, 실패했다.
그렇게 사회전반적인 반일감정에 고종의 탈출시도까지 겹치며
일본의 조선 지배는 결국 줄타기를 하는 파국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대만 문제였다.
일본이 대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만을 무력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대만은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영토이자 중국인이 거주한 땅임에도 중국의 정체성과는 애매하게 거리가 있었기에,
일본이 점령하면 시모노세키 조약을 거부하고 저항할 가능성이 컸다.
1895년 말 대만에서 대만민주국이 수립되었고, 일본의 지배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거부하는 대만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대만인은 거칠게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1895년이 끝나기도 전에 대만민주국은 붕괴되었다.
대만에는 일본 최초의 군정청인 대만총독부가 설립되었고,
대만 독립 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된 가바야마 스케노리가 초대 대만총독에 취임했다.
가바야마의 대만 통치는 강압적이었고, 대만 독립 운동 이후에도 무장 소요 사태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결국 이후 청과의 외교 갈등 및 대만 통치 안정화를 위해 일본은 가바야마를 귀국시켰고,
대신 야마가타파 육군의 가쓰라 다로가 대만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3대 대만총독에 노기 마레스케가 임명되며 가쓰라는 귀국했고, 2차 마쓰카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부임하는 게 유력했으나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육군대신에 다카시마 도모노스케를 임명하며 삿초 육해군 갈등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1896년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일본의 제국주의화 및 확장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각은 척식무성을 설치했고, 대만 및 향후 확장될 영토에 대한 대비 및 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본 앞에 충격적인 소식이 당도했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했고,
2차 김홍집 내각을 파직시켰으며, 친일 인사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은 궁을 나오자마자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러시아가 인천에 군함을 파견했다.
조선 고종의 아관파천.
일본은 유길준, 우범선 등 2차 김홍집 내각의 관료가 일본으로 피신할 수 있게 조치했으며,
조선 주재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러시아 공사관에 파견해 고종의 환궁을 위한 협상을 전개했으나
협상은 실패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감했으며, 러시아를 필두로 서양 국가들이 조선의 이권에 접근했다.
일본이 진행한 그간의 조선정책이 순식간에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일본 근현대사 > 메이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후 공황과 지조증징 이슈 (4) | 2024.12.06 |
---|---|
시모노세키 조약 (0) | 2024.11.01 |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0) | 2024.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