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은 여기로
조약개정에 한정되지 않고 2차 이토 내각의 청일전쟁 이전 외교 활동을 다룰 것이다.
물론 핵심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다.
부제목은 '조약개정의 완성'정도가 좋겠다.
정한론 논쟁이고, 임오군란 이후 재점화된 정한론 열풍이건,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 조선을 장기적인 점령대상으로 본 건 번벌파와 민권파가 동일했다.
1892년(메이지25) 2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2차 이토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국회를 장악했고 선거 간섭으로 번벌파에 반발하던 민권파를 회유하려 노력했는데,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무대신에 앉힌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그 외에도 자유민권운동의 주역 중 한명이자 입지사와 자유당 출신인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已) 역시 발탁했는데,
오이시가 임명된 것은 다름아닌 조선 주재 일본공사였다.
외교관 출신이 아니었기에, 그의 조선공사직 임명은 전래가 없는 것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의 행적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시각 및 향후 조선 지배 정책 구상에 대해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한철호 교수의 논문인 '자유민권론자 오이시 마사미의 한국 인식'을 참고하는 게 좋다.
오이시가 조선을 관찰하며 향후 조선 정책을 구상했다면, 당장의 필요한 대조선정책과 그 정보를 캔 것은
오이시의 후임자였던 오토리 게이스케였다.
보신전쟁에도 참전했던 무관이었고, 그가 이끌던 전습대는 신정부을 상당히 애먹였기에,
그가 파견된 것 자체가 향후 조선에서 있을 일본의 군사활동에 대한 대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애초에 오토리는 누구보다 강경했던 대청 개전론자였다.
즉 이유와 과정을 따지기 이전에, 오토리가 조선에 간 그 순간부터 일본의 전쟁준비는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만 즉각적으로 이를 이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이 직면한 최우선의 외교적 과제는 조선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총 지휘자는 대청 개전론에 대해 온건했던 인물이었다.
2차 이토 내각에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건 무츠 무네미츠였다.
해원대 출신에 주미 일본공사와 각종 장관을 역임한 인물로, 이제 그가 조약개정교섭의 필두가 된 것이었다.
줄곧 말했듯 조약개정은 일본의 외교적 최우선 과제이기에, 일본 내외에서도 조약개정을 위한 활동이 지속되었다.
조약개정교섭에 가장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낸 아오키 슈조도 주영 일본공사로서 조약개정교섭을 도왔다.
하지만 문제는 민권파였다.
민권파는 영사재판권 논란 이래 조약개정이 아닌 조약의 완전 폐지를 주장했고,
조약개정으로 맺어지는 신조약을 비굴한 조약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츠는 아오키안을 기반으로 한 신조약(영일통상항해조약)의 체결을 밀어붙였다.
1893년(메이지26) 결국 조약개정을 위해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여론이 국수주의적으로 변해가고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내각은 다시 한번 중의원을 해산했다.
1894년(메이지27)에만 두번의 선거를 치뤘고, 이 모든 것을 희생할 가치가 있던 게 바로 조약개정이었다.
1894년 7월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었다.
수입관세가 소폭 인상되고, 거류지의 폐지 및 외국인의 내지잡거가 허용되었다.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는 아직 금지되었고, 영사재판권은 폐지되었다.
1899년(메이지32) 시행을 목표로, 12년 간의 유효기간을 상정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동시에 안세이 5개국 조약 중 영일수호통상조약이 폐기되었다.
시간을 한달 정도 앞으로 돌려보자.
청군이 출반하자 1894년 6월 초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했다.
일본이 인천을 선점해버려 먼저 도착한 청군은 아산만에 정박해야했고, 파견한 군대도 소규모였다.
반면 일본은 오토리 공사를 필두로 군대를 보내 인천, 부산, 원산을 선점함과 동시에 한양에 진군해버렸다.
따라서 청은 이미 정치적, 지정학적 중요 지점을 내준 상태였고,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기에는 수적으로 부족했다.
청과 일본은 영국, 미국, 러시아의 중재하에 수차례 협상을 가졌으나
애초에 전쟁을 하려고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청과의 외교적 평화협상은 의미가 없었다.
온건론자였던 무츠 외무대신도, 이미 강경론자들이 원하는대로, 전쟁에 동의했고
1894년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고 며칠 후인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에 난입했다.
외교적 걸림돌이 줄어든 일본은 전쟁에 집중할 여력이 충분해졌고,
경복궁에 진입해 모두 공무를 대원군에게 양도하라고 협박한 것이었다.
1894년 7월 25일 대원군에 의해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며 조선의 청군을 일본군이 몰아내달라'라는
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근대 일본이 일으킨 네번의 큰 전쟁에서 일본은 단 한번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아산만으로 향하는 세척의 군함과 한척의 수송선이었다.
일본 해군은 아산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풍도에 매복했고, 세척의 군함 중 한척은 침몰, 한척은 나포했으며,
수송선 역시도 침몰시켰다.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 근현대사 > 메이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0) | 2024.11.01 |
---|---|
청일전쟁 직전의 동아시아 (0) | 2024.10.31 |
1890년의 경제공황과 해외 이주 (0) | 202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