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산업혁명은 분명 성공했다.
이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대가 시대라서, 메이지 시대의 산업혁명은 큰 한계점을 대동하고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내수시장에만 의존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무역 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세자주권이 없어 이에 의존하기는 힘들고,
애초에 원자재는 주로 외국에서 수입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철광석은 수입 없이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외국에 일본 물품을 팔아봤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구미 열강의 식민지는 애초에 그 존재가 구미 열강의 상품을 판매할 목적도 있었기에 일본 상품이 낄 틈이 없었다.
그나마 청과 조선에 대해, 특히 대조선 무역에서는 대규모의 흑자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나
상인을 중심으로 격화되던 조선의 반외세 감정을 신경 쓸 수 밖에 없으니 변수가 있었다.
결국 일본의 산업혁명은 내수에서만 돈이 도는데,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크니
장기적으로는 침체를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조선과 청을 일본의 시장으로 만들면 된다.
청은 힘들더라도 조선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극혐하는 나라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청이었다.
1871년(메이지4) 창설된 청의 북양해군은
1888년(메이지21)에 들어서는 '근대식 해군' 그리고 '극동 최강의 해군'이라 불릴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애초에 일본과 방식이 달랐을 뿐 양무운동이라는 자체적인 근대화가 진행되었기에 군사력만큼은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청의 시각에서도 해양진출을 위한 교두보이자 무역 수지 흑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이 역시도 조선이었다.
류큐 처분 때와는 달리 그 중요성 및 동아시아의 패자라는 자존심에 있어
청에게 조선은 양보할 수 없는 국가였다.
조선을 구도 위와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음은 어쩌면 전세계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1885년(메이지18) 거문도 사건의 영향으로 조선의 유길준은 조선 조정에 조선중립화론을 제시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중립국이 되어 영러간, 청일간의 소용돌이에서 빗겨가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이를 영러와 청일이 두고 볼 일도 아니었고, 친청파와 친일파로 구성된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조선중립화론이 조용히 묻혔다가 현대에 재발견된 이유도 이와 같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이미 국력이 박살났음을 전세계에 자랑했고,
거문도 사건과 방곡령 사건으로 이제는 외교력도 처참하다는 걸 보여줬다.
어쩌면 조선을 위한 마지막 기회는 민초들의 혁명과 개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라도 고부군(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리)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횡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만행은 전국적으로 그리고 1800년대 내내 지속되었던 것이기에,
이에 백성들이 불만을 가진게 하루이틀은 아닐 것이었다.
결국 동학교도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메이지27) 음력 1월 봉기를 일으켰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도망쳤고, 조정은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고부군의 농민 봉기를 잠재우라고 명령했지만,
잠재우는 방법에는 달래는 것만 아닌 죽이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용태의 폭압적인 후처리에 전봉준 등은 다시 봉기했고,
이제는 전주성을 지나 한양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1894년 음력 3월
서양식 병기와 훈련된 군대가 농민군에게 패배하더니
이제는 전주성까지 함락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 어떠한 여력도 남아있지 않은 조선 조정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는 대규모 삽질을 자행했고,
청의 위안스카이는 이것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여기며 조선으로 진군했다.
청의 원군으로 텐진조약에 의거해 일본군이 조선에 당도할 것이고, 곧이어 청일 간의 전장으로 조선이 불바다 될 것을
조선도, 청도, 일본도 다 알고 있었다.
승리하면 조선을 얻는 걸로 모자라 상대를 무너트리며, 패배하면 멸망의 길이 시작하겠지만
언젠가 해야할 필수적인 목숨빵이었다.
그렇게 청과 일본에게 기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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