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한 내각
한국인이라면 좋아할리가 없는 그 인물, 이토 히로부미.당연히 나 역시도 이 인물에 호의를 보이기는 싫지만, 메이지시대에 있어 이 인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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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메이지31) 와이한 내각의 붕괴와 함께 헌정당이 헌정당과 헌정본당으로 갈라섰고,
이 헌정당이 재벌 및 번벌파 세력과 손을 잡고 입헌정우회에 합류하면서 민당파는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계에서 은퇴하여 헌정본당의 중심을 잡아줄 인물이 부족했고
민당파의 마지막 정당처럼 되어버린 헌정본당은 상당히 동요했다.
심지어 오자키 유키오 등은 현실적인 이유로 입헌정우회에 입당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1910년(메이지43) 11회 중의원 총선거를 앞둔 정국에서
헌정본당의 이누카이 츠요시 등을 중심으로 군소정당이 연합하여 입헌국민당이 조직되었다.
비록 입헌정우회에 비하면 의석과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중산층과 지식을 중심으로 지지층을 형성해갔고
1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95석을 획득해냈다.
이 숫자는 209석을 획득한 입헌정우회에 비하면 아쉬웠지만, 번벌파 정당인 중앙클럽과 비교하면 세배에 달하는 의석 수였다.
시선을 바꾸면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해진다.
2차 사이온지 내각 당시 제국의회 중의원은
여당인 사이온지 긴모치의 입헌정우회가 209석, 민당파인 입헌국민당이 95석이라면,
번벌파 군부의 과도한 영향력과 그 영향으로 인한 2차 사이온지 내각의 붕괴는
381석 중 무려 314석의 반발을 살 행동이 아닌가?
관동군 2개 사단 증설 문제 논의와 가츠라 다로의 복귀
관동주 관동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삼국간섭과 아관파천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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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다이쇼1) 말 가츠라 다로가 총리에 복귀하며 3차 가츠라 내각이 구성되었다.
당연히 안으로는 야마가타파가, 밖으로는 민당파가 가츠라 내각에 불협조적으로 행동했으며,
특히 번벌파 내각의 성립으로 민당파의 반발이 거셌다.
민당파는 힘이나 정치적 논리가 아닌, 헌법에 의거한 정치를 요구했고, 가츠라 내각의 성립에 반대하는 호헌운동을 전개했다.
호헌운동은 한번 더 있을 예정이라 이를 1차 호헌운동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군이라도 확실했으면 모를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가츠라 다로에 협조할 이유와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야마가타파는 이미 가츠라 다로를 축출하기 위해 모의하던 상태였다.
졸지에 역대 최악의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버티는 가츠라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슈번사 선배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많은 것을 따왔다.
가츠라는 우선 다이쇼 덴노의 후견인처럼 활동했고, 3차 가츠라 내각의 모든 활동에 있어 다이쇼 덴노의 입과 권한을 빌리곤 했다.
심지어는 그 누구보다도 3차 가츠라 내각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사이온지 긴모치에게도 호헌운동을 멈추게 하였다.
이렇듯 덴노의 보호를 받다보니 민당파와 정우회 내에서도 가츠라 내각에 대한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고,
입헌정우회는 심지어 가츠라 내각에 호응하는 것을 당론으로 내세워 오자키 유키오 등과 당내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정국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야마가타파도 표면적으로는 쉽게 3차 가츠라 내각을 건드리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차 호헌운동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자키 유키오는 정우회 내 반 가츠라 내각파(호헌파)를 소집해
비밀리에 입헌국민당 소속인 자신의 베스트 프렌트 이누카이 츠요시를 만나고 왔으며,
1913년(다이쇼2)에는 아예 입헌정우회를 탈당해 입헌국민당과 합당하여 헌정옹호회를 결성했다.
1차 호헌운동은 정우회와 입헌국민당의 투트랙에서 헌정옹호회 중심으로 전환되었으며,
아예 번벌정치 철폐와 가츠라 내각의 퇴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호헌운동이 격화되었다.
가츠라는 이 사태를 해결하고 야마가타파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버리기 위해
아예 정치인으로 독립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가츠라는 중앙클럽과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창당하는 방안을 구상했고,
다이쇼 덴노가 직접 명령해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이에 호응하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효력도 내지 못했다.
실제로 창당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치에 신물 난 듯한 사이온지는 추밀원에서 영향력을 내세우는 데 집중하며 내각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번벌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번벌파 내에 파벌이 야마가타파만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야마가타파와의 관계를 버리고 가츠라 다로와 붙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3차 가츠라 내각의 입지가 약화되자 헌정옹호회는 덴노 뒤에 숨어있지 말고 나오라고 내각을 압박했고
결국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해버렸다.
입헌정우회마저 내각불신임안에 동조해버리면서 내각불신임권이 통과되자
3차 가츠라 내각은 제국의회를 정지시키는 최후의 수단을 감행했고, 그 연장선으로 시위가 대거 발생하고 유혈사태까지 일어나자
가츠라 다로를 위한 그 어떠한 우군은 사라지고 말았다.
1913년 다이쇼 정변이 발생했고, 사실상 야마가타파, 정우회, 민당파 모두의 동의로 인해
가츠라 다로는 결국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총리직에서 내려온 가츠라는 그대로 정계에서 은퇴했고, 얼마 안가 사망했다. 향년 65세.
이 당시 마츠카타 마사요시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살아있었고, 이노우에 가오루가 죽은 지 약 한달여된 시점이란 걸 감안하면
총리직 퇴임 직후 그대로 몸고생 맘고생으로 암에 걸려 사망한 것이라 보는 게 맞겠다.
물론 그래도 누릴 권세 다 누리고, 2886일 간 재직한 역대 최장기 2위의 총리지만 말이다.
가츠라가 죽고, 사이온지도 추밀원에서 활동하면서 게이엔시대를 장식한 두 인물은 사실상 현실정치에서 은퇴했다.
그러면 누굴 총리로 해야할 것인가. 데라우치라도 귀국시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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