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가 죽고 연호가 바뀌며 정국은 전반적으로 야마가타파의 입맛에 맞추어 변화해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마가타파에서도 대안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현실적으로 타협안에 동의해야했고,
그렇게 내정된 총리인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퇴임했다는 건 사실 그렇게 긍정적인 정치적 결과라 해석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기에 차기 총리는 기왕이면 야마가타파와도 타협이 가능할 베테랑이 필요했고,
과거 이토와의 회담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와세다대학 운영에 집중하며 교육자의 삶을 살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1913년(다이쇼4) 깜짝 정계 복귀를 하여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
당연히 이러한 결정에 대해, 과거 와이한 내각을 침몰시키는 데에 일조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호의적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었고, 이 타협안을 제시한 게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는 점에서
야마가타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했을 것이다.
아마 야마가타파 입장에서는
놀고 있는 전 해군대신 사이토 마코토를 조선 총독에 앉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귀국시키는 수준의 조치가 아니라면
가망이 없는 정국이긴 했을 것이다.
오쿠마의 총리 내정에 있어 정당 정치인의 지원도 없지 않았다.
1913년(다이쇼2)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는 동지회라는 정당의 창당을 준비했으나 사실상 실패했고,
3차 가쓰라 내각 붕괴 이후 3차 가쓰라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가토 다카아키를 중심으로
가쓰라파와 친 가쓰라 내각 정우회 인사, 그리고 번벌파인 중앙클럽을 합쳐 입헌동지회가 창당되었다.
1914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계에 복귀하자 정계에 기반이 사라져있던 오쿠마는 입헌동지회와 손을 잡았고
그렇게 일본에 정말 오랜만에 정당내각이 탄생하게 되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가토 다카아키를 외무대신에 임명했고,
내정은 오쿠마가, 외교는 가토가 담당하는, 과거 와이한 내각의 체제와 비슷한 양상의 내각이 구축되었다.
여기에 더해 오자키 유키오를 사법대신으로 임명해 중정회의 협조까지 확보했고,
그렇게 입헌동지회-중정회 연립내각으로 2차 오쿠마 내각이 출범한 것이었다.
조약개정 5
이번 편의 부제를 담는다면조약개정의 완성과 세계 정세정도겠다. 어쩌면 조약개정보다는 제국주의 국가로 완성된 일본이 세계 정세에 점차 어떤 위치로 향해가는 지가 중요하겠다.전편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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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한참 돌려 1908년(메이지4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 정세가 독일에 집중한 틈을 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를 합병하였고(보스니아 위기)
이는 1차 발칸 위기로 확대되며 발칸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쟁만큼은 부담스러워했던 러시아와 달리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위기를 국운이 달린 비상사태라 여겼고,
비록 실현되지 않았을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노림은 분명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세르비아에 러시아는 적극적인 호응을 하지 않으니 국민적 불안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모두가 아는 그 사건이,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다.
1차대전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다시 일본 내부 정치로 돌아가자면
1차대전은 사실 2차 오쿠마 내각의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전쟁에 집중하게 되니 군부의 불만은 감소했고, 야마가타파 등의 정치적 공격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게다가 애초에 민당파의 입장에서는 과거 헌정본당 수장이었고, 메이지 유신의 일원이었던
오쿠마라는 리더이자 아이돌이 등장한 것이었기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일례로 1915년(다이쇼4) 진행된 12회 중원선에서
여당인 입헌동지회(153석), 중정회(33석), 오쿠마백후원회(12석)는 도합 198석을 획득했고,
반면 야당인 입헌정우회와 입헌국민당은 각각 108석과 95석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이 당시 중화민국에 21개조 요구안을 제출하고 영일동맹에 대한 호응으로 산동반도 공격에서도 큰 성과를 냈기에
2차 오쿠마 내각의 입지가 흔들릴 거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얼마 안가 사고가 터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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