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여기로
이번엔 동아시아의 청과 조선을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청
두차례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청 조정은 이미 그 여력을 상실했음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따라서 청은 개혁과 발전이 급했고, 이를 위해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공헌한 한족 관료들이 중용된다.
이홍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61년 함풍제가 피신지인 열하에서 붕어하고, 서태후, 동태후, 공친왕 혁흔이 신유정변을 일으킨다.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은 전부 죽거나 실각했고, 그 빈자리를 두 태후와 공친왕이 차지하면서
청나라의 양무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온갖 개혁 정책이 시행되고 양무자강을 위한 기관이 신설되었으며 서양으로 유학생을 보냈다.
다만 문제는, 황실의 적극적인 사치로 인해 자금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재정 회복과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한 기기국들은 돈이 없으니 저품질의 무기를 양산했고,
이대로면 동도서기의 기치는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조선
18세기의 대기근은 조선의 경제를 완벽하게 박살냈다.
그나마 회복되나 하자마자 대기근이 다시 한 번 겹쳤고, 여기에 세도정치가 유발한 정치 문란으로
조선은 급속도로 망해갔다.
일본이 흑선사건 이전에 그랬듯 이양선의 출몰로 사회 불안이 증폭되는 가운데 조정은 무능했고,
이것이 몇년에 그친 것이 아닌, 세명의 왕이 재위한 64년 간 지속되었다.
1864년 조선 철종이 후사 없이 붕어했고,
차기 국왕에 11세인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 섭정 체제가 시작된다.
조선 최초의 생존한 대원군은 그 위상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삼정에 개혁을 가했고, 세도정치와 붕당정치를 와해시켰다.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 탄 경복궁을 복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개혁이 과연 제국주의 위협이 구체화된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을 구원해주지는 않았다.
서학(가톨릭)은 조선 사회를 동요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서양에 대한 혐오감으로 확대되었다.
이 혐오감은 베트남의 가톨릭교도들이 프랑스에 동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팩트로 굳어졌고,
병인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가톨릭 박해와 함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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