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신전쟁을 시작으로 메이지시대를 논해야 하지만,
앞으로 외교나 정치 방면에서 외국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기에
흑선사건 이후의 세계정세를 가볍게 다루고자 한다.
미국
미국은 일본을 개국시킨 나라였지만, 1860년대부터 왠만해서는 일본에 대해 개입하지 못했다.
시모노세키 전쟁과 개세약서 등 막말의 역사 사건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후술할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하면 존재감이 흐릿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북전쟁을 앞두고 그 원인인 노예제 존속 여부를 두고 미국 내 강등이 뚜렷했기 때문으로,
결국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며 그 갈등은 완전히 표면화된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1865년에 끝이 나지만
그 이후에는 먼로 독트린에 기반한 아메리카주의로 인해 아시아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메이지 이후에도 미서전쟁 이전까지는 일본과 관련되어 언급할 거리가 그리 많지도 않다.
영국
미국을 대신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대화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하지만 그 적극성에 비해 외교적 자세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강경하지 않았다.
소위 '위대한 고립'이라 불리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으로
영국은 자국의 이익과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떠한 외교적 개입을 피했다.
반대로 자국의 이익과 관련이 있다면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했는데,
두차례의 아편전쟁과 1839년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53년의 크림전쟁이 그 예라고 보면 되겠다.
그 외에도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하였고,
세포이 항쟁으로 무굴제국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편입시켰다.
이 당시 영국이 설정한 위협적 국가는 프랑스와 러시아였는데,
프랑스의 경우 전통의 경쟁상대라 그렇고, 보불전쟁 이후 몰락해 영불 간 경쟁이 너무 과열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러시아는 인도를 위협할 수 있는 뚜렷한 영국의 잠재적 위협국가였기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및 부동항 확보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프랑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산업혁명이 도입되어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했고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를 침략했으며, 멕시코에는 제국을 설립했다.
하지만 보불전쟁 이후 장기공황이 들이닥쳤고, 그 결과 식민지 확대에는 소극적이게 변한다.
힘을 전부 소진해 몰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제국 비스마르크에 의해 적극적인 외교적 활동에는 제약이 걸리기도 했다.
독일(프로이센)
빈 체제의 몰락과 1848년의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는 모순적이게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개의 제국을 강화시켰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수상에 임명되었고,
비스마르크를 선두로 소독일주의의 독일통일이 진행된다.
1866년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수립했고,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해 독일 통일에 성공해낸다.
비스마르크는 이후 유럽 정세의 중심추 역할을 했고, 식민지 진출도 시작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비스마르크에게 접근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러시아
표토르 대제의 개혁이 성공하며 유럽 최대의 영토와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게 될 밝은 미래가 러시아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증명이 되는 듯 했지만, 1853년 크림전쟁의 패배로 허상임이 드러났다.
러시아는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이었고, 이를 타계하는 사회문화적 유럽화에 더불어,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남하정책을 진행한다.
문제는 이러한 남하정책은 장기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위협할 가능성이 컸고,
동시에 영국이 러시아를 위협적 국가로 인식해가면서
영러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해져 갔다.
선술했듯,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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