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소카이 정권과 신센구미, 교토 미마와리구미의 활약으로 교토의 좌막파의 도읍이 되었다지만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에게 발탁된 사쿠마 쇼잔이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암살당하는 등
교토는 여전히 존황양이 천주가 자행되고 있었다.
1866년(게이오2) 막부는 군사체계는 전부 개편한다.
고베 해군견습소를 기반으로 막부해군을 개선함과 동시에, 막부육군을 설치하고 네덜란드인 장교를 영입해 훈련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에조치 하코다테에 고료가쿠를 건설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러한 정책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었고, 마침 이 즈음에 프랑스가 막부에 접근했다.
막부는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자 했고, 그 결과 삿쵸는 영국, 막부는 프랑스와 결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한편 존황양이파 공경 22인은 이와쿠라 도모미 등 존황양이파 공경의 명예회복 및 복직,
그리고 조정의 개혁을 고메이 덴노에게 제의했다.
이에 고메이 덴노가 호응해줄 리가 당연히 없었고, 결국 22인의 공경은 황거에서 소요를 일으켜 결국 근신처분을 받게 되었다.
(정신22경예참사건)
이와쿠라 도모미가 배후로 일으켰다는 설이 있으며, 이 사건은 이후 고메이 덴노 암살설의 근거처럼 사용된다.
효고항 개항이 다시 연기되었고, 이를 두고 서양 국가들은 다시 한번 항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개세약서가 체결되어 일본의 관세자주권은 완전히 침해되고 만다.
게다가 고잔지 거병으로 조슈는 다시 존황양이파로 돌아섰고, 고메이 덴노가 이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다카스기 신사쿠 등은 막부의 명령으로 에도에 압송되어야 할 인물인데,
이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건 두번째 조슈 정벌을 유도할 수 밖에 없었다.
고메이 덴노는 다시 한 번 조슈 정벌을 명령했는데, 문제는 이에 아무도 적극적인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러한 고메이 덴노의 결정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는 자신의 후견인인 사쓰마를 다시 동원하려 했지만,
이미 사쓰마는 조슈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막부 역시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에모치 쇼군은 조슈 정벌에 호응해 직접 조슈를 향해 친정을 감행했다.
다카스기 신사쿠 등의 활약으로 2차 조슈 정벌은 큰 성과 없이 이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 막부를 위한 최악의 비보가 들려온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이 오사카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20세.
이에모치 쇼군은 사망 직전 차기 쇼군에 기이번의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내정했으나,
이에사토의 나이는 당시 3세였고,
오오쿠는 막부의 권위를 위해 차기 쇼군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한다.
요시노부는 이를 거부했지만, 막부에 적임자는 그뿐이었다.
이에모치 쇼군의 급사로 2차 조슈 정벌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이 나게 되었다.
공경들은 이미 뒤에서 고메이 덴노 뒷담이나 까고 있고,
막부는 게이오의 군사개혁을 강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협상했다.
공무합체론을 이어가기 위해 고메이 덴노와 요시노부 쇼군이 연계한다면 막부의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막부를 위한 비보가 다시 한번 들려온다.
고메이 덴노가 급사한다. 향년 35세. 너무 급작스러운 죽음이기에 각종 암살설이 지금도 언급되고 있다.
공무합체론의 두 축인 고메이 덴노와 이에모치 쇼군이 연달아 고인이 되면서 결국 공무합체론은 붕괴하고 만다.
후임 덴노와 요시노부 쇼군이 연계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새로운 덴노의 나이는 열넷에 불과했다.
고메이 덴노 사후 사쓰마번은 조정에 조슈번의 명예회복을 건백했다.
얼마 안 가 이와쿠라 도모미와 존황양이파 공경 22인의 근신처분이 해제되었다.
막부 토벌에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한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번은 군대를 일으켜 도막전쟁을 준비했고,
사카모토 료마와 고토 쇼지로는 교토로 이동해 야마우치 요도에게 대정봉환을 제의했고,
야마우치 요도의 이름을 대표로 하여 대정봉환건백서가 막부에 제출된다.
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1867년 11월 19일) 교토 니조성 니노마루
도사번의 이름으로 대정봉환을 전제로 정이대장군직의 유지와 번병의 출병 금지를 내용으로 한 건백서가 막부에 제출되었다.
번병의 출병 금지가 내용으로 있었지만, 이 제안을 거부할 시 사쓰마, 조슈, 도사의 군대가 요시노부 쇼군을 향할 예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은 건백서를 수리하며, 대정봉환을 선언했다.
에도 막부가 공식적으로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막부의 결정에 분노한 것은 당연히 좌막파 인사들이었다.
누마타번과 아이즈번은 상락해 이러한 결정에 항의했으며,
대정봉환에 과정에서 사쓰마의 배신을 인지한 요시노부 쇼군 역시 점차 좌막파의 항의에 동감해갔다.
게이오 3년 음력 12월 사쓰마는 거병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사쓰마의 주도로 왕정복고대호령과 오방의 게시 등 새로운 정부로의 체제 개편이 추진되었고,
요시노부 쇼군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를 반납하라고 결의했다.
요시노부 쇼군은 이러한 조정의 요구에 응하여 오사카성으로 퇴각했다.
이러한 상황은 사쓰마가 공식적으로 요시노부 쇼군을 배신함과 동시에 요시노부 쇼군에게 있어 거병할 계기를 주었고,
요시노부 쇼군은 막부의 육해군에 아이즈번, 누마타번, 쇼나이번, 미토번, 신센구미, 교토 미마와리구미를 추가해
존황양이 번을 상대할 병력을 조직했다.
무진년 음력 1월 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은 사쓰마 토벌령을 선언하며 교토로 출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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