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
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멀기에 일본은 대규모의 사절단을 계획하게 되었다.
조선이야기는 서계사건과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870년(메이지3) 메이지 신정부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특정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을 조직하였다.
사절단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
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
부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이하 생략
참고로 이때 동반해서 보낸 유학생들 멤버가 짱짱하다.
나카에 조민, 단 다쿠마, 마키노 노부아키, 쓰다 우메코, 오토리 게이스케 등등
이때 유학을 간 인사들은 이후 메이지시대의 주요 지식인 및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조약체결국의 원수 및 주요 인사와 만나 교류할 것
2. 조약개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며, 조약개정교섭을 진행해 소정의 성과를 거둘 것
3.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여 신정부에 필요한 지식을 가져올 것
그리고 이와쿠라 사절단이 추진한 조약개정의 우선 목표는 행정-입법 분야에서의 제약을 덜어내는,
'사실상의 한계'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본고에서는 그 부분을 중요히 보려하며, 그들의 자세한 행적은 생략하고자 한다.
대사수행직으로 간 구메 구니다케가 쓴 '특명전권대사미구회람실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그 책이 없다.
1870년 12월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에 도착했다.
'일본은 피 한방울 안 흘리고 개혁을 이루었으며 서양의 문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혁을 추진 중이다'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연설에 미국인들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렇기에 이와쿠라 사절단의 조약개정은 가능해 보였다.
1871년초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백악관에 방문했고,
율리시스 그랜트 당시 미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며 조약개정을 추진했다.
초반에는 미국과의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기에 조약개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갑자기 미국 측이 특임전권대사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전권위임의 증거를 요구했고,
그렇게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전권위임장을 받아오려 일본에 다녀오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던 오쿠보와 이토는 편무적 최혜국 대우의 문제점을 깨닳아
각국 협상을 기조로 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활동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체되었다.
그렇게 오쿠보와 이토가 복귀하기 전 미국과의 조약개정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미국에서의 조약개정교섭이 결렬되자 이와쿠라 사절단은 단기적인 조약개정교섭은 포기했고,
그 대신 서양의 문물을 시찰하고 서양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양의 문물 중 특히나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정치제도와 정부의 형태였다.
미국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연약하게 구는 모습 등을 보며 그들의 체제는 유약하다고 생각했고,
영국에서는 영일 간의 경제산업격차를 체감했고, 영국의 군주정을 보며 받아들일 점과 문제점이 공존한다고 파악했다.
프랑스는 당시 보불전쟁과 파리코뮌 영향으로 치안이 혼란한 상태였기에,
이와쿠라 사절단은 프랑스식 민주공화정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독일의 경우 황제와 총리 아래에서 체계가 잡혀 발전하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게 되었다.
독일은 일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접했고, 만국공법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때부터 독일의 체제에 대한 호감이 일본 정계에 퍼지게 되었으며,
그 중심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음은 이후의 메이지 13년 정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실질적인 목표는 서양과의 교류 확대 및 조약개정에 있었으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 대신 유학생을 보내고 서양의 체제 및 산업을 시찰하는 것에 집중했고, 이는 이후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와 교류했고, 이와쿠라 사절단 부사 중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유럽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조약개정을 제외하면 그 효과는 충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등지를 방문하던 이와쿠라 사절단에게
국내에 잔류해 정무를 이끌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귀국 요청을 보냈다.
요청 사안은 각 성의 업무 분담을 위한 개편이었지만, 겸사겸사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 전쟁을 하려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렇게 이와쿠라 사절단은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가 1873년, 메이지 6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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