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
사족과의 연계를 주장했기에, 낙향 이후 사족들의 불만에 호응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정한파들 중에는 이토 신페이처럼 적극적인 무력 저항을 추진한 사람도 있었고,
사이고 다카모리처럼 배후에서 조용히 준비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무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뒤집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1874년(메이지7)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를 중심으로 민선의원설립건백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
후쿠이번사였던 유이 기미마사, 애국공당을 결성하기 전의 에토 신페이 등 신정부의 중역들이 참여했기에
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선의원설립건백서의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일본 위키백과가 참 편해.
대충 메이지 신정부의 체제는 덴노 중심의 정치도, 공의정체도 아닌 유사전제정이며,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천하의 공의'를 펼칠 민선의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어우 가타카나 너무 싫어.
메이지 신정부가 이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체제로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바는 신정부와 정한파 양측 모두 동의한 것이기에
이에 맞는 조치가 조금씩 취해진다.
1875년(메이지8) 좌원과 우원이 폐지되고 원로원과 대심원이 설치되었으며, 지방의회가 소집되었다.
같은 해 메이지 덴노는 제헌을 통해 장래에 입헌체제를 구축한다는 조서를 발표했고, 이때부터 일본은 제헌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체제는 어떤 체제가 좋을까?
영국식? 미국식? 독일식? 프랑스식?
자세한 부분에 있어 어떤 형태가 필요할까? 헌법은 어떻게 해야할까?
이 부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건백서의 형태로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 건백서를 작정한 인물도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같은 정치인,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지식인 뿐만 아닌,
소학교 선생, 기업인, 농민에 이르는 다양한 건백서가 정부에 쏟아졌다.
자유민권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타가키는 낙향 직후 입지사라는 정치단체를 설립했고,
1875년 이를 애국사를 개칭해 확대시켰다.
그래도 이타가키는 사이고나 이토 신페이와 달리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와 오사카에서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안건은, 당시 병으로 낙향한 기도의 정계 복귀, 삼권분립과 입헌주의에 기반을 한 정부 구성에 대한 논의였고,
결국 이 부분에 대해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다.
오사카 회의의 결과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는 참의로 복귀했다.
정한론 논쟁 이후 야당이 된 정한파 중에서도, 이타가키와 고토의 의견은 확실히 다른 정한파와 차이를 보였다.
사족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번벌파 신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은 대정봉환에 이르는 과정을 훼손하는 것이며
무력이 아닌, 정치참여를 확보해 목소리를 높히는 것이 사회 안정과 이상 실현에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타가키와 고토는 이 당시 있었던 사족 반란 중 그 어떠한 것도 지지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정한파의 대표격이었던 사이고의 행보와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이고와 철천지 원수가 된 오쿠보와 달리, 기도는 주기적으로 사이고에게 연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도가 사이고에게 보낸 편지 중, 이상한 짓 하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사이고는 실제로 나가사키에 해군병학교를 설립하고 가고시마에 사설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뜻에 따르는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무력과 정신력을 강조한 사이고는 얼마 안가 신정부에 불만을 가졌던 사무라이들에게 있어 그 리더가 되었고,
겸사겸사 과거 존황양이의 기치를 생각하면 그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메이지 신정부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신정부는 사이고가 있던 가고시마를 경계했지만, 설마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지는 않은 듯하다.
사이고가 자신의 손으로 세워 올린 정부이고, 사족 반란 해봤자 다들 길어야 한달이었다.
이런데 설마 사이고가? 에이 설마
1877년(메이지10) 사이고의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수장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추대했다.
남규슈가 들고 일어났고 그렇게 서남전쟁(세이난전쟁)이 발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남규슈의 호응에 힘입어 빠르게 북상했고,
이를 막을 사실상 최초의 거점이 바로 구마모토성이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인도 동원해서 지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결국 함락되지 못한 울산왜성 전투의 이유를 증명하듯,
근대전이고 뭐고 극강의 방어력을 자랑했다.
사이고가 이끄는 군대는 두달간 구마모토성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그렇게 야마모토 아리토모,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정부군의 공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부군에는 사이고 주도(사이고 다카모리의 친동생), 구로다 기요타카, 오야마 이와오(사이고 다카모리 사촌동생) 등
사쓰마번사도 대거 포함되었고, 순조로이 가고시마로의 진입을 허가하고 말았다.
결국 1877년 9월 시로야마 전투를 끝으로 가고시마가 함락되었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서남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쿠보를 가로막을 정치적 요소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이타가키와 고토는 우군으로 영입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죽었다.
기도 다카요시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쉽지만, 어쩌면 이로 인해 오쿠보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밖에 없겠다.
1878년 5월 14일 도쿄 기오이자카
메이지덴노를 알현하러 아카사카궁으로 이동하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족 출신 무사들에게 암살당했다.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모두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달리했다.
그렇게 유신삼걸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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