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일년여의 시간 동안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세명의 인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 명을 달리했다.
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조 사네토미를 제외하면, 소위 '유신의 첫 세대'로 부를만한 정치 거물은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르 채운 것은 40대 초반, 30대 후반의 조슈 젊은 인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해준 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유신삼걸이 그랬듯, 중심이라 할만큼의 존재감을 보인 건 이토 혼자만이 아니었다.
도사번 출신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도 있었고, 사가번 출신의 오쿠마 시게노부도 있었지만,
어떨 때에는 이토와 손을 잡고, 어떤 때에는 이토와 경쟁하며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메이지 일본의 정권 핵심으로 그 존재감을 보여 준 세명의 조슈번사들이 있었다.
한 명은 선술한 이토 히로부미,
나머지 둘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였다.
이 셋을 어울러 '조슈삼걸'이라 칭한다. 조슈가 이게 전부는 아닌데 일본 애들이 참 3을 좋아한다.
세 명 모두 요시다 쇼인에게 수학해 다카스기 신사쿠의 휘하에서 활약한 조슈번사였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이 1863년(분큐3)에 유학보낸 조슈파이브에 속해 있었고,
세명 모두 혈기왕성한 존황양이지사이자 서양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지식인이었다.
나이 순대로 하면 이노우에가 36년생, 야마가타가 38년생, 이토가 41년생으로, 이토가 가장 막내였지만,
정권의 중심으로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이토였고, 가는 데에는 역시 순서가 없었던 것 같다.
조슈삼걸과 유신삼걸의 비교하자면,
양측 모두 욕심이 그득그득했던 것은 동일하다. 정권 욕심도 컸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차이라면, 다재다능하여 별 걸 다했던 유신삼걸과 달리, 조슈삼걸은 역할이 각각 존재했다.
세 명 모두 사무라이 출신이지만, 육군으로 바로 진입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달리,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문관의 길을 걸었다.
이토의 경우 문관 관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고, 서남전쟁이 일어날 즈음에는 문관 관료, 행정직들의 대표같은 입지를 보유했다.
이노우에의 경우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국할 때 일본에 잔류했고, 재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슈삼걸의 역할은 1870년대 말에 들어서 상당히 뚜렷하게 분화된 상태였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은 내무경이자 행정직의 대표 입지를 굳힌 '문관인사의 대표'
야마가타는 병부성과 육군에서 일했고 이후 육군대신을 역임한 '조슈 육군의 대표'
이노우에는 다재다능하게 여러 분야에서 일하면서, 외교에서도 뚜렷한 행적을 보인 '외교관의 대표'
내정은 이토, 외교는 이노우에, 군사는 야마가타라는 역할 분담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유신삼걸과 비교해 그 차이점에 있어 깔끔하게 역할분담이 되었다는 것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교적 뒷 이야기가 안나오는데, 유신삼걸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있다.
야마가타는 돈 문제가 더럽고, 이토는 여자문제가 더러우며, 이노우에는 둘 다 더럽다.
외국에서 일한 시간이 많다보니 뒷이야기가 비교적 덜 유명해진 이노우에와 달리,
이토와 야마가타는 이 분야에 대해 유명한 에피소드가 각각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저 셋은 다카스기 신사쿠, 요시다 쇼인, 유신삼걸과 달리 상당히 장수했기에 오래 집권했으며,
그렇게 그들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꽤 오랜 기간 등장하게 된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저 셋 모두 쳐죽일 놈이다. 설명은 상당히 길어지니 생략하겠다.
물론 저 셋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가번 출신이자 대장성과 외무성에서 활동한 경제, 외교 관료 오쿠마 시게노부,
대장성에서 일하며 메이지 유신 초기의 재정정책을 담당한 사쓰마번 출신 마쓰카타 마사요시,
도사번의 핵심 of 핵심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
언급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존재감은 뚜렷한 구로다 기요타카, 사이고 주도,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등
그래도 우선 저 셋을 언급하고 가는 게 편해서 일단 소개해봤다.
일단 기오이자카의 변을 오쿠보 도시미치가 죽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이토 혼자서는 정국을 주도하기 힘드니, 이를 양분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와세다대학의 창립자로 유명한 오쿠마 시게노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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