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
중국사서에는 모인(毛人)이라고 나오는데, 털이 그들을 묘사해준다는 점에서 일본인과의 외형적 차이를 유추하게 해준다.
실제로 아이누계 남성들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다.
이러한 외형적인 면부터 중국 북방계, 한국계, 중국 남방계, 폴리네시아계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지금의 일본인과 차이를 보였고,
지금도 아이누는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 홋카이도 일대에 사는(혹은 살았던), 이누이트와 비슷한 민족으로 여겨진다.
사회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누만의 전통과 문화가 분명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아이누는 분명 '야마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중앙집권적 왕국을 구성하지 못했고, 일본과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명칭부터 원래 도호쿠 지방에 살던 아이누인들을 토벌하기 위한 직책이었고,
최초의 정이대장군 사카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원정이 끝날 즈음에는 도호쿠는 전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홋카이도와 그 이북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마쓰마에번이 설치되면서 홋카이도도 점차 일본령으로 변해갔다.
홋카이도, 그리고 그 북쪽에 있는 가라후토(사할린)와 치시마(쿠릴열도).
지금도 잊을만하면 나오는 주제인데, 아이누는 일본인이고, 아이누의 땅인 저 지역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메이지시대의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이 저 지역을 선저한 근거가 있어 나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이 사실 자체가 러시아와의 충돌 위험을 내포한 시한폭탄이었다는 것이다.
1867년(게이오3) 에도막부는 러시아와 러일 가라후토섬 임시규칙을 체결했다.
가라후토와 치시바에 대한 영토 조정만을 거친 것이었고, 러시아와의 영토문제가 미봉된 것 조차 아니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러시아와의 영토 갈등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홋카이도 개척사 역시 이런 상황으로 인한 정책의 일황이었다.
1870년(메이지3) 메이지 신정부는 홋카이도에 이어 가라후토에도 개척사를 설치했다.
가라후토와 치시마에 일본인 거주지를 건설한다는 건 저 시대에는 막말로 전쟁하자 이런 거였다.
하지만 일본도, 러시아도,
내부사정으로 개혁이 급한 상태였기에, 눈 앞의 적은 아무튼 서로가 아니었기에 일단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1875년(메이지8) 러일 간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이 체결된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밀려가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인프라 구축이 급했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홋카이도 방면의 안전이 확보되고 치시마를 확보하는 효과에
조선 문제, 조약 개정 등 다른 외교현안에 집중할 여력을 확보하는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에 나온 결과였다.
1880년대 세계정세가 급변했다.
러시아는 발칸-페르시아 방면의 남하정책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단념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시공하며 동방으로의 진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동방은 연해주를 의미했지만, 부동항에 미친 러시아라는 걸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청과 조선은 물론이요. 일본도 여기에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1885년(메이지18) 영국은 이러한 러시아의 동향을 눈치채고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비록 이것이 실질적인 효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제주도 점령 시도 등 러시아의 남하가 동아시아로 향해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이 체결된 후 10년 간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완성했고,
이제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극동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 분위기는 러일전쟁 전까지 지속되었다.
아니. 조선문제로 인해 오히려 증폭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홋카이도와 치시마, 그리고 아이누인을 일본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898년(메이지31) 홋카이도 원주민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이름은 보호법이었지만, 내용은 오히려 아이누인에게 제약을 가하고 차별하는 것이었으며,
이 법이 제정되어 많은 아이누인들이 탄압받고 민족 정체성을 잃어갔다.
아이누 문화와 아이누어는 파괴되었으며, 최근에 들어서야 이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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