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 이야기는 여기로
주도자가 누가 되었건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원하는 '정명향도'의 기반이 닦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정부 중역인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메이지9)은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에 집중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사족반란과 낙향한 정한파의 반발,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자유민권운동까지,
게다가 이러고 서남전쟁과 기오이자카의 변으로 일본은 정부 수뇌부가 급작스레 교체되었다.
누군가는 덴노 헤이카를 위해 조선을 정벌하라고 닥달하지만,
주장하는 측도, 정부도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할 여력이 없었다.
자유민권운동으로 민권파의 활동이 격화되었던 1881년(메이지14)일본에게 절호의 기회가 생기고 만다.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있어, 강화도조약과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비교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강화도조약 이후의 일본의 행적과 막말 서양 외교관들의 행적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수신사와 조사시찰단을 보낸 조선에 대해 일본은 당근과 채찍을 꺼냈다.
문명개화와 근대화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주요 지식인에게 접근해 친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일본의 이익에 위반될 정책이 발생하면 이에 반발하며 조선 조정에 개입하려 했다.
물론 이러한 것도 임오군란과 조청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에는 차질이 생겼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이 1870년대 말에 진행시킨 대조선전략은 막말 서양의 것과 유사했다.
대신 '아시아의 모범'이니 '서구화의 선두'니 하는 이미지를 이용해, 조선에 나름 협력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주요 젊은 지식인들은 조선을 하대하는 청에 대해 반감을 보였고,
따라서 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가까이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후술할 김옥균, 박영효 등이 그 예시이다.
조선은 군제개편과 군사개혁을 위해 5군영을 2군영으로 통폐합함과 동시에 이를 대신할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별기군은 일본의 지원 하에 창설된 군대였고, 별기군의 교관에는 일본인 교관이 영입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구식군대에 반일정서를 만들었고,조선 선혜청이 임금으로 쌀반 모래반을 하면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구식군대는 궁궐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한 후 쌀반 모래반의 주범인 민겸호,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등을 살해했다.
일본인이 죽었네?
자유민권운동은 바로 이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정한론이 다시 제기되었고, 이번에는 온건파 하나 없이 강경론으로 결집했다.
하지만 정치감각 일본사GOAT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이렇게만 보지 않은 듯 했다.
명성황후는 미쳐가지고 청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경복궁에 진입하면서 임오군란은 끝이 났다.
구식군대가 추대한 흥선대원군은 복권되자마자 청으로 납치되었다.
일본은 임오군란의 후처리에 대해 배상금과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을 요구했고,
가뜩이나 할말없는데 위안스카이에 조정이 이리저리 휘둘리다보니 조선은 또 일본의 제안에 무조건 수락을 해버렸다.
그렇게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은 잃을 게 없었다.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배상금이 두둑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를 필두로 청은 조선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 과정은 이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진행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문제는 친일파로 가득했던 1905년 이후의 대한제국과 달리, 당시 조선 조정은 친청파만 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청의 지나친 내정간섭으로 오히려 반청파가 성장했고,
일본 그러한 반청파에게 접근했다.
일본은 반청 성향이 강했던 급진개화파에게 접근했다.
물론 정부차원에서의 대화가 아닌, 조선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김옥균 일파 간의 대화였다.
김옥균 등은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서는 메이지 일본과 같은 급진적이고 대규모의 개혁을 원했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청의 간섭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홍집, 김윤식 등 친청 성향의 온건개화파는 현실적인 이유로 김옥균의 개혁안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가 청의 위협이었다.
김옥균이 제시하는 전면적인 개혁안에는 큰 재정 지출이 불가피했고,
김옥균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대화하여 일본 차관을 도입하도록 약속하게 되었다.
차관과 지원받는 국가에 맞춰 양분된 정국. 게이오 연간을 보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 조선에게 남은 건 대정봉환인가? 그러면 일본에게는 득될 것이 없다.
여기에 더해 묄렌도로프의 정치공작 등이 있었고 결국 일본 정부는 논의된 적이 없다며 조선 차관 도입을 취소시켜 버렸다.
김옥균의 외교적 성과는 허풍으로 바뀌었고, 김옥균의 정치적 입지가 추락했다.
결국 김옥균 일파는 1884년(메이지17) 쿠데타를 일으켰으나(갑신정변), 사흘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 등이 제시한 정강 14개조 등은 폐기되었고, 위 사진에 나온 4인방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김옥균 일파가 망명 길에 오른 그날
일본 공사관이 불탔네?
일본은 신이 났는지 군함 7척을 보내 조선을 위협했고,
배상금과 조선 돈으로 일본 공사관을 신축(재건 아님)하는 내용의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텐진으로 이동해 이홍장을 만났으며, 조선에 대한 양측 간의 조정인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조선을 압박하던 청군과 공사관을 경비한다던 일본군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조선군대를 양분시킨 청과 일본의 교관들도 귀환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양분된 조선군이 하나가 된 건 아니었다.
그리고 향후 모종의 이유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시 통보해야한다는 규정을 걸었는데,
이게 무슨 결과로 이어질지는 이 때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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