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익 나왔고, 군사학에 대한 것이나 전쟁사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편제, 전술, 무기 등에 대한 건 최대한 배제하고 서술하도록 하겠다.
군대 이야기를 하는데 정치, 외교, 경제, 사회적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말이 되게 했기에 일본이 2차대전에서 진 거다.
1869년(메이지2) 병부성이 설치되었고,
막부가 조정의 사병이라는 형태의 군사제도가 대신 '조정의 군대' 혹은 '정부의 군대'로 개편되었다.
이후 1872년(메이지5)년 병부성을 폐지하고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화시켰으며,
1873년(메이지6)에는 전국민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일본 육군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설립한 조슈번의 기헤이타이, 그리고 게이오 개혁으로 만들어진 막부육군에서 기초했다.
막부육군은 보신전쟁에서 졌으니 기헤이타이가 중심이 되었으며 다카스기 신사쿠는 보신전쟁 전에 죽었으니,
기헤이타이 출신 무관의 대표격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초대 육군경에 임명되었다.
전국민 징병제와 직업군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곧 기존에 군인의 역할을 했던 집단,
즉 사무라이 계급에 대한 해고통지나 다름없었다.
1871년 신분해방령과 산발탈도령(폐도령)이 공포되었고, 1873년에 복수엄금이 공포되어 천주가 불법이 되었으니,
이제 남은 사무라이에게 역할이란 주어지지 않았다.
몰락한 무사들은 당연히 사족들과 결탁했고, 반정부집단이 되었다가 자유민권운동, 사족반란 등지에 합류했다.
그렇다고 사무라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폐도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건 서남전쟁 언급하며 다루었고, 서남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반정부 사족이 무릎을 굽힌 것도 아니었다.
1877년(메이지10) 서남전쟁이 끝이 났고, 군비 지출은 곧 국가 재정의 위기를 유발했다.
결국 일본은 육군 일부를 해산해 군비 지출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큰 반발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실직자가 된 군인들은 낭인처럼 활동했고, 1878년(메이지11) 다케바시 사건이 발생했다.
퇴직이 예정된 육군 근위대가 무장반란을 일으켰고, 비록 금세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이 사사하는 바는 컸다.
군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군이 하나의 통합된 집단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육군경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군인훈계'를 발표함과 동시에 군제를 개편해 덴노의 군대로 만들려했다.
야마가타가 구상한 군제개편은 이토와 이노우에의 반대를 샀고, 결국 야마가타는 육군경을 내려놓게 되었다.
하지만 육군은 야마가타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렇게 소위 조슈파벌이 장악한 번벌 군대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메이지-다이쇼 육군의 중심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심지어는 야마가타를 쳐다볼 수도 없는 세대의 다나카 기이치까지
전부 조슈번 출신이다.
여담으로 조슈번 출신이 아닌 인사도 없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센다이번 출신의 도조 히데노리가 있었다.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이다.
1882년(메이지15) 군인칙유가 공포되었다.
군대는 무조건 덴노에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칙유' 그러니까 메이지 덴노가 내린 명령이었다.
군인칙유의 작성 및 지시에 있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도했으며, 내용도 군인훈계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그 덕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군 극우파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해군은 가쓰 가이슈가 만들었던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를 그 기원으로 본다.
군함 구매 등 재정적인 이유로 육군과 달리 성장이 늦었으며,
1876년(메이지9) 일본해군병학교가 설립되어 해군 육성이 본격화되었지만,
해군병학교는 사쓰마번이 주도해 세워진 학교였고, 그 배후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었기에
서남전쟁 직후 폐교되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고 그 덕에 육군과 비교하면 사건이 딱히 없었다.
초대 해군경에 취임한 것은 '일본 해군의 아버지' 가쓰 가이슈였다.
정한론 정변에서 낙향한 사이고가 해군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이었기에 이를 견제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후 가쓰는 대만출병에 반대하며 해군경에서 사임했고,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등이 해군경을 역임했다.
서남전쟁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중심에는 사쓰마번이 있었다.
해군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사쓰마번 출신이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곤베에), 사이고 주도, 도고 헤이하치로, 가바야마 스케노리 등등 말이다.
다만 그 시작에 있어 육군보다 늦었고, 가쓰 가이슈나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입지가 야마가타 아리모토만큼은 아니여서 그런지
아직은 사쓰마번 중심의 해군이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삿쵸 파벌 갈등이 육해군으로 전염된 상태도 아니라서
사이고 주도처럼 육군과 해군을 옮겨가며 일한 인물도 있었다.
(애초에 저 시대는 아직 육군과 해군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1881년(메이지14) 야마모토 곤노효에를 중심으로 함대 증설을 주장하는 강경한 파벌
'함대파'가 결성되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를 따랐던 사쓰마 출신 해군인사가 중심이 되었으며,
이후 삿쵸 파벌 갈등의 해군 측 파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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