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산업 혁명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성공적이었다.
1884년(메이지17)부터 관영공장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민간기업에 공장을 불하했는데,
이는 오히려 민간기업과 자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해원대를 기반으로 한 미쓰비시 상사는 해운 사업으로 대박이 났고,
소매업으로 시작한 미쓰이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민관합동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영원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1890년 일본에 경제공황이 들이닥쳤다.
마쓰카타 재정으로 시작된 디플레이션 및 증세의 역효과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되었지만
기업체들의 성장과 무역량의 증가로 점차 일본 경제는 세계경제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불황의 여파가 일본에 덮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국가 수입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시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신생산업국에 불과했기에 경제적으로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단기간에 이를 타파하기는 힘드니, 그 대신
미주로 일본인을 보내 그들을 통해 국가 수입을 증가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선봉에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있었다.
에노모토는 이전부터 해외에 토지를 구매해 이를 기반으로 식민도시를 건설하고자 했기에,
미주로 일본인을 보내 경제활동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그 중 에노모토가 주목한 것은 멕시코였다.
1893년(메이지26) 식민협회를 설립한 에노모토는 수차례 멕시코에 다녀오며 작물생산량 및 수익성을 점검했고,
이후 멕시코 이민을 주도하게 되었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도 일본인이 진출했으며,
특히 미국인 이민자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문제는 이러한 이민에도 대불황의 상흔을 메우기에는 부족했고,
정부 고관들과 뒷돈으로 묶인 자본가와 기업들은 당장의 경제공황을 타계하기 위해 대놓고
전쟁특수를 요구했다.
그런데 뭘로?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명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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