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은 여기로
조약개정. 그놈의 조약개정.
이게 3편이고, 4편에서 끝날지 5편에서 끝날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
기왕이면 5편에서 끝내는 게 친절한 설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편의 부제목을 달자면 '오쓰 사건'이겠다.
시간을 되돌려 1889년(메이지22) 12월.
새로운 내각총리대신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었고, 구로다 내각이 총사임했으니 장관이 전부 바뀌어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외무대신에 주영 일본공사를 역임했던 아오키 슈조가 임명되었다.
당시 1회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었기에 야마가타 총리는 민당파의 반발을 막음과 동시에
번벌파의 지지율을 높힐 정책에 대해 강구했다.
물론 주요 현안에 집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주요 현안이자 야마가타의 이해관계 맞아 떨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약개정교섭이었다.
구로다 내각이 제시한 오쿠마안에 대해 반대했던 야마가타였기에 당연하게도 오쿠마안은 폐기되었다.
야마가타는 아오키 슈조와 함께 새로운 조약개정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의 법관 임용은 불가능하다
2. 영사재판권이 유지되는 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3. 조약에 법전의 공포를 명기하지 않는다.
4. 외국인에 대해 경제-법률상 어떠한 경우에는 특권에 대해 제한을 둘 수 있다.
이를 '아오키 각서'라고 한다. 이후의 조약개정에 있어서도 일본정부의 기본 방침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각각 오쿠마안에 대한 폐기, 영사재판권과 내지잡거의 교환 가능성, 행정, 입법 절차에서의 '사실상의 한계' 타파 등을 목표로 한 것으로
아오키 슈조 여기에 각국 협상 방식을 우선하며, 영국과의 협상에 집중한다는 것을 추가했다.
이는 편무적 최혜국 대우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개항 이래 일본에 대해 가장 불협조적이었던 나라가 다름아닌 영국인데,
아무리 영국공사를 역임해서 영국에 인맥이 있을 아오키라지만, 영국인이랑 결혼한 아오키라지만,
영국이 일본과의 협상에서 호응을 해줄까?
아오키 슈조는 친영인사라기 보다는, 당대 그 누구보다 영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지영(知英)인사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그렇기에 당대 그 누구보다 영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5년(메이지18)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는 제주도를 점령하려했고, 그렇게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가 동아시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1887년(메이지20) 영국은 거문도를 유지할 여력이 안되고 러시아가 부담스러워 결국 거문도를 떠나게 되었다.
대서양도, 인도양도 아닌 태평양 인근까지 자국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영국에게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말레이반도와 조선 사이를 중간에 연결해줄 지점도 사실상 홍콩 하나였기에 지리적 한계점 역시 뚜렷했다.
따라서 영국은 극동방면에 대해 그간의 강경책을 포기하고 우군을 찾으려 움직였고, 그러한 동향을 바로 파악한 사람이 바로
아오키 슈조였던 것이다.
물론 아오키가 바로 이러한 국제 정세의 동향을 파악해 이를 근거로 조약개정교섭을 단행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아오키 슈조도 영국이 조약개정교섭에 호응해주리라 기대하지 않고
일단 조약개정교섭을 진행시킨 것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영국이 일본의 조약개정안에 호응해준 것이었다.
1890년(메이지23) 9월 아오키 외무대신은 영일통상 및 항해조약 초안을 각의에 제출했고,
영국은 4년 간 새로운 법전을 시행하고 그 1년 후 일본 국내를 외국인에 개방하라는 조건 하에
조약개정에 찬성했다.
1891년 중순 조약체결을 목표로 조약개정교섭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1891년(메이지24) 5월 1차 마쓰카타 내각이 수립되었다.
아오키 슈조는 조약개정교섭의 핵심이었기에 외무대신직에 당연히 유임되었다.
이제 조약개정이 완성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정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뛰어들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는 중앙아시아 방면의 그레이트 게임을 진행하면서
인프라 부족과 이로 인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군인도 물자도 운송하는데 한참 걸려 영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못했고,
패권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패권 경쟁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88년(메이지21)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프랑스의 니즈를 파악해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했고,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을 명령하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국은 이를 위협적으로 파악했고,
그레이트 게임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동아시아로 확장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일본에서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은 곧 위기로 인지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론이 정계뿐 아닌 민간에도 돌았다는 것이었다.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후일 니콜라이 2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을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참여할 예정이었고,
겸사겸사 일본을 방문해 여행했다.
황위계승 예정자였기에, 니콜라이 황태자는 국빈에 준하는 인물이었고, 아오키 슈조는 그의 안전을 러시아에 약속했다.
1891년 5월 11일, 니콜라이 황태자는 비와호 관광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오쓰시 시내를 지나던 니콜라이 황태자의 앞에
시가현 경찰서의 츠다 산조 순사가 나타났다.
츠다 순사는 들고 있던 사브르로 니콜라이 황태자를 공격했고,
동승 중인 그리스 요르요스 왕자 및 근처에서 순찰 중인 경찰에 의해 제압당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오른쪽 두부에 9cm 정도의 자상을 입었다.
오쓰 사건이라 불리는 무려 타국의 황태자를 대상으로 한 천주였다. 세르비아야 뭐야
대형 사고
어쩌면 이게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던 상황이라 메이지 덴노가 직접 교토로 와서 니콜라이 황태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성의를 보였고,
주요 학교는 휴교, 신사와 교회에서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쾌차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심지어 '츠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는 조례가 야마가타현에서 통과되었고,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사과의 의미로 자살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일본 전국이 공포에 떨었지만 다행히도 니콜라이 황태자는 쾌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오키 외무대신은 오쓰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아오키 슈조는 외무대신직을 사임했고, 영일통상 및 항해조약 역시 체결 직전에 무산되었다.
후임 외무대신에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임명되었다.
에노모토는 아오키안에 '신조약 체결 후 6년이 지나면 일본은 영사재판권을 폐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한
에노모토안을 내각에 제시했다.
주영 일본공사로 이전한 아오키 슈조도 이에 호응해줬지만, 내각은 조약개정을 할 여력이 안되었다.
중의원 해산 및 선거개입과 총선거로 1차 마쓰카타 내각은 정신이 없었고, 조약개정교섭도 그대로 중단되어있었다.
결국 마쓰카타 내각의 총사임과 함께 에노모토 외무대신의 임기도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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