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 사건
일본의 극단주의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천주이자, 천주의 무의미함을 대표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 하나로 조약개정에 4년을 더 소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일본의 사법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고자 한다.
츠다 산조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공격한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일본에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공포감이 즐비해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착공이 그 계기이기는 하지만, 에도시대부터 이양선은 대부분 러시아가 보낸 것이었고,
가라후토-치시마 조약으로 미봉되었을 뿐, 북방영토에 대한 양국의 영토 갈등은 잔존해있었다.
다음으로 츠다 개인의 문제가 있었다.
츠다는 상당한 국권파였고, 그는 러시아의 극동 강경책에 불만을 가짐과 동시에,
그 원인이 서남전쟁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에 있다고 여겼다.
사이고는 가고시마의 시로야마에서 죽었지만 화마로 인해 그 시체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이런 인물이 늘 그렇듯 생존설이 있었다.
따라서 사이고의 반정부-매국 행각에 분노하여 그 보복으로 니콜라이 황태자를 죽인다는 게 오쓰 사건의 배경이 되겠다.
어휴 진짜
오쓰 사건 이후 당연하게도 츠다 산조는 사형집행 대상이었다.
문제는 일본 법에 일본 황족을 공격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처분 및 형벌에 대해 설명되어있는데
외국 황족에 대해서는 그 설명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의 처분은 무조건 유권해석이 필요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계엄령을 발표해서라도 츠다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을 했고,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총리대신, 아오미 슈조 외무대신,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도 사형에 찬성했다.
고토 쇼지로는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츠다를 납치한 후 권총으로 사살하자고 말했고,
이노우에 가오루도 법치주의를 이유로 소극적인 반대를 표했다.
그런데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는 사형 선고가 불가능하다. 이것도 일본 법에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유권해석은 모순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대심원장 고지마 고레카타는 '일본이 법치국가로서 법은 준수되어야 하며, 외국 황족에 대한 법령이 없다'는 이유로
츠다 산조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 직후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은 사임했고, 내각과 민당 모두 이 판결에 대해 반발했다.
그럼에도 고지마는 내각의 압력에 대해 크게 반발했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결국 얼마 안나 도박혐의로 대심원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물론 도박혐의는 무혐의엔딩이었다.
오쓰 사건은 이로 인해 일본에서 삼권분립이 강조되는 최초의 사건이 되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이 사건 이후 일본 사법부는 2차대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권이 원하는대로 판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렇기는 하나 사법부의 독립성이라는 주제가 최초로 제기된 사건이었기에 그 영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고지마의 판결이 무색하게도, 츠다 산조는 무기징역 복역 중인 1891년 9월 병으로 옥사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여기도 독살설이 있지만, 급성폐렴이 사인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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