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
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
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
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
근데 일본은 싫대.
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
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마 황족이 하급무사 듀오를 만나러 오겠어? 이홍장 그 노인네가 일본까지 배 타고 오겠어?
쟤네 죽으면 청나라도 같이 죽는데?ㅋㅋㅋㅋㅋㅋㅋ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멸망과 노인네 고생 중 노인네 고생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단 왔으니 협상은 해줘야하지만, 그렇다고 종전할리는 없었다.
1895년(메이지28) 일본은 진짜 말도 안되는 내용의 청일강화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이럴 바엔 그냥 북경이 함락되는 거나 다름 없었기에 이홍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토나 무츠는 전쟁을 지속하려 했기에 이홍장이 사인을 해주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던 어느 날
이홍장은 협상 종료 후 숙소로 돌아가던 중 고다마 도요타로에게 건총으로 습격당했고 중상을 입게 되어버렸다.
아오 그놈의 천주 진짜
가뜩이나 노인네 불러서 시간이 죽치고 있는데 외국 대표에 중상까지 입혔으니 서양 열강은 일본을 비난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토와 무츠는 종전협상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이홍장은 암살 위협으로 산 뒷길로 협상까지 이동해야했고, 지금도 그 길은 이홍장 길로 불리며 산책로로 쓰인다.
저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그 유명한 시모노세키 제1조이다.해석하면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 됨을 확인하며,
이로 인해 독립자주를 해칠 수 밖에 없는, 조선국에 의한, 청국에 대한 조공 책봉의 전례 등은 장래 전부 폐지해야 한다.
조청관계와 청일관계를 비교하며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만들었다고 비웃었지만,
이 내용의 진의는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영원히 청은 조선에 손 떼라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청은 일본에 펑후 열도와 대만, 요동반도를 할양했으며, 군비 배상금 순은 2억냥을 7년 이내에 지불해야 했다.
참고로 이 금액은 일본의 4년치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며, 미 지불액에 대한 연 이율 5%도 붙어있었다.
보너스로 일본은 편무적 최혜국 대우까지 가져온다.
제국주의 열강 대일본제국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리는 조약이었다.
효과는 엄청났다. 내각의 지지율은 급등했고 1890년의 경제공황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엄청난 양의 배상금이 들어왔으니 전후공황 정도는 가볍게 처리했다.
대만과 펑후열도는 일본의 첫 식민지가 되었고, 조선은 친일 김홍집 내각으로 운영되니 여기도 곧이었다.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거인에게 조약개정을 신청하고 있다.
게다가 요동반도를 확보해 대륙침략의 교두보까지 획득했다.
일뽕을 드높히 올려라.
하지만 왕관을 거머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했다.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는 것은 서구 열강이 일본을 제국주의 경쟁 상대로 여길 수 있다는 우려를,
즉 향후 일본은 서구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 경쟁 가능성은 1년도 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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