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대로 상륙해 성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중인 청군을 격퇴했다.
이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평양성으로 향한 청군을, 남으로는 전라도의 동학군을 상대했으며,
우금치에서 동학군은 궤멸, 평양성 전투도 조선 관군이 암묵적으로 청을 지원했음에도 일본이 승리했다.
전장은 요동으로 넘어갔으며, 웨이하이 전투에서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전멸했다.
대만과 펑후열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
우장 개항장이 함락되었고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해 북경을 향해 진군하자
청은 주력군이 전멸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고,
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과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이 종전협상을 거부하자
이홍장이 노신을 끌고 이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1895년(메이지28) 3월 30일의 일이었다.
이견의 여지가 없을 청의 대패. 동아시아의 거인 청은 그렇게 무너졌다.
그렇다면 왜 청은 패배했는가? 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는가?
내 모자란 중국사 지식에 전공 수업 배웠던 걸 혼합하여 적어보도록 하겠다.
물론 군사학적인면은 최대한 제외하면서 말이다.
우선 교과서에도 익히 나오는 양무운동과 메이지 유신의 차이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근대화 및 산업혁명은 군사력 강화에만 치중되지 않았다.
정치 체제, 법과 제도, 경공업(특히 모직물), 중공업, 1차 산업 및 관련 제도 개편, 학술, 금융 및 경제 등등
정말 여러 분야에 걸쳐있었다.
반면 양무운동은 군사력 강화에만 집중했다.
예를 들어 금릉기기국 등의 군수공장 건설에 집중했는데,
기반 산업이 없으니 중공업 발전이 진전된 일본과 달리 무기 품질에 있어 뚜렷하게 떨어졌다.
양무운동의 동도서기론에서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곤 하는데, 난 조금 다르게 본다.
청의 양무운동은 기본적인 기초나 토대 없이 서양의 무기 및 군수시설만을 도입하려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서구식의 군사력 발전이 아닌, 서양 흉내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이는 무기나 화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막말유신기부터 서양의 장교들을 초빙해 장교를 키우고 전술적 연구를 꾸준히 했던 일본과 달리,
청은 군사 인재 발굴에 소극적이었다.
군제 역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서구식 군제를 도입한 일본과 달리
청은 전통 군제에 서양식 군제를 끼워맞춘 식이었으니 이래저래 개판이었다.
결론적으로 군대vs군대로 붙는다면 청은 일본에 비해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다음으로 청 조정의 문제점이다.
잊을만 하면 언급되는 전통시대 전제정치가 서구화를 방해하는, 그런 권위주의적인 양상,
근데 막말로 에도막부나 조슈삼걸의 뒷돈 욕심을 생각하면 사실 이걸 타파했다고 일본이 이겼다보기는 힘들다.
진짜 문제는 규모가 달랐다는 것이었다.
서태후는 한끼에 128가지 음식을 먹었으며, 그녀의 1년 식비는 1000여명의 백성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저 메뉴가 매일 바뀌었다고 한다. 만한전석의 모티브를 준 인물답다.
옷이나 장신구도 별에 별게 다 있었고, 화장품에도 돈을 덕지덕지 발랐으며, 전용 자동차, 전용 기차에
전용 궁전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 유명한 이화원의 경우, 북양함대 예산을 빼돌려 이화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지만,
이화원의 관리 및 유지, 그리고 이화원에서 열리는 잔치에 쓰일 예산을 생각해보면
이화원 때문에 군비에 제대로 투자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니 군사력에만 집중한다는 문제점을 지닌 양무운동이었지만 이런 식이면 군사력에 집중해봤자일 것이다.
돈이 없는데 대체 뭘해?
마지막으로 조선에 대한 안일한 판단이다.
한반도가 덩치에 비해 지형과 기후 등으로 인해 완전정복이 불가능하다는 건 중국사가 오래오래 증명해왔다.
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려면 충분한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고, 군대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일전쟁은 청의 초동 대체부터 분명히 잘못되었다.
조선의 수뇌부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조선의 주요 거점을 선점하지도 않았다.
병력도 초반에 이미 일본이 훨씬 많이 보냈다.
반면 일본은 강화도조약 직전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돈을 뿌려 친일파를 양성하려 노력했고, 정치적 이유에 맞다면 동학군도 민간(겐요샤)을 통해 지원했다.
반면 청은 아무것도 없었다.
친청파였던 온건개화파는 청일전쟁 즈음에 친일로 돌아섰고,
위안스카이와 청 상인들의 횡포로 조선에는 반일감정만큼 반청감정이 고조되어있었다.
그 어느 것도 조선에 대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이 청일전쟁 직전 인천, 부산, 원산을 장악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조선은 청의 편일 것이라 본 것일까? 명분에서 조금 앞선 것을 과신한 것일까?
이건 결과론이 아니다. 만일 청이 이겼다면 '청의 안일한 준비에도 일본이 무능했다'고 평가했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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