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메이지28) 을미사변이 발생했고,
아무리 조선을 쌩무시하던 일본이라지만 일단 을미사변의 주동자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둘 수는 없었다.
미우라 고로가 귀국된 후 후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는 고무라 주타로가 내정되었다.
무츠 무네미츠의 측근이기도 했던 고무라였기에, 고무라가 조선에서 진행할 임무는 기존 대조선정책의 유지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얼마 안가 아관파천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조선정책은 큰 변곡점을 맞을 수 밖에 없었기에
고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선 내에서 일본이 그간 차지한 권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고무라는 즉시 이에 대한 협상을 가졌고, 조선주재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와 하나의 비밀 각서를 체결했다.
이것이 바로 '베베르 고무라 각서'이다.
동년 비슷한 시기,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이 있었고, 일본의 특사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파견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즉위식 후 러시아의 외무장관인 로마노프 로스토프스키를 접견해
조선에 대한 러일 양국의 입장 조율 및 협상을 전개했다.
로마노프 러시아 외상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해 러시아는 묵인해준다는 밀약에 서명해주었고
이를 '로마노프 야마가타 밀약(혹은 의정서)'라고 한다.
조선은 민영환을 특사로 파견해 러시아 주요 인사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으나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국제적 입지는 차이가 컸고, 야마가타와 달리 그 어떠한 외교적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멸망직전의 상태임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주요 이권은 고종의 안위를 위해 판매되었고, 러시아의 보호국이나 다름없는 위치였기애 협상력도 부족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은 뚜렷했고 조선 내의 반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론을 달랠 유일한 방법은 고종의 환궁뿐이었고, 결국 1897년(메이지30) 고종은 파천생활을 마치고 환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조선 내의 러시아의 영향력에 금이 간 것이었다.
이제 일본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포인트를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는 조선의 반러 감정의 영향으로 조선 식민지화의 희망이 부활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러일 경쟁 및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다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양무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청은 이제 누구든 쓰러트릴 수 있는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게다가 군사적으로 몰락했기에 이제 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양 열강이 간을 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한편 독일은 빌헬름 2세의 즉위 후 얼마 안가 중립외교를 강조하던 비스마르크가 실각했고
팽창주의 노선(신노선 정책)으로 국가 정책을 완전히 전환했다.
1897년 독일은 신노선 정책의 일련으로 신교사 살해 사건을 빌미 삼아
산둥반도 키아우초우(산동성 칭다오시 자오저우만)를 불법 점령했다.
군사적 여력 따위는 청일전쟁 때 전부 상실한 청이었기에, 독일의 요구안을 전부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청독조약으로 산동반도 전역이 독일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한 청 황실은 1898년 메이지 유신과 같은 완전한 서구화를 추구했고,
그 개혁을 위한 관료에 량치차오, 캉유웨이 등이 중용되었다.
이를 변법자강운동 혹은 무술변법이라 한다.
그들의 과감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뒤에 광서제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에 반발한 수구파 및 수구파의 배후에 있던 서태후의 쿠데타(무술정변)로 인해 변법자강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변법파는 국외로 망명하거나 제거되었고, 광서제는 유폐되었다.
당시 변법파는 군사권도 장악했는데, 하필 그 역할을 시킨 게 위안스카이라서 망했다.
18세기 말 미국은 극단적인 실리주의라 표현해도 될 정도로
아메리카 대륙 밖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 자세로 일관했다.
일본에 대한 것이 그 예로, 미국이 일본을 개방시킨 나라였음에도 에도시대 말부터 영국보다 존재감이 떨어진 것은
미국이 아메리카주의로 인해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방면에 영향력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1898년 미국은 아메리카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쿠바, 푸에르트리코 등지를 점령한 스페인과 전쟁을 치뤘다.
신흥 산업국과 무너진 과거의 패자 간 힘싸움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고,
미국 스페인 전쟁(미서전쟁)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1898년 체결된 파리 조약으로 스페인은 보유한 식민지 중 일부를 포기해 미국에 양도해야했는데
그 곳이 바로 쿠바, 푸에르트리코, 필리핀이었다.
쿠바와 푸에르트리코는 그렇다치지만 필리핀은 이야기가 좀 달랐는데, 이유는 당연히 필리핀이 아시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지배를 위해 미국은 정책을 일부 수정해야 했고, 이러한 전환점이 생기면서
미국은 그간 가졌던 아메리카주의를 포기하고 아시아 방면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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