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메이지31) 1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에 내정되면서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 내에는 번벌파가 꽉꽉 들이찼으며, 야마가타답게 주요 안건들은 전반적으로 통과되었다.
그래도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헌정당(구 자유당계)과 연계하여 전반적인 안건을 원하는대로 통과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나 싸워댔던 지조증징 법안은 2차 야마가타 내각 출범 직후 통과되었으며,
1899년(메이지32)에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 역시 통과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각에 대한 개편안은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을 말하는 것인데,
문관임용령은 정당 소속인의 내각 임용을 금지하는 법이었고,
문관분한령은 내각의 교체에도 국무대신과 관료들의 위치를 보전시켜주는 법이었으니,
이는 제국의회와 자유민권파 정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번벌파의 입지를 유지시킬 심산이 뚜렷한 조치였다.
게다가 1900년(메이지33) 치안유지법의 기초가 되는 치안경찰법이 공포되면서
이제 일본 정부가 시위와 소요사태를 진압할 합법적 수단을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국을 보며 이토 히로부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자신이 가진 기회와 상대(야마가타파)의 약점을 공략할 계획은 뚜렷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문관임용령과 문관분한령은 자유민권파 정당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야마가타 내각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했던 헌정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기업의 입장에서도 뒷돈에 미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며 이를 이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0년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주의와의 결별을 고하고 정당 설립 계획을 공식화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진행한 일련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였으니
후배의 하극상에 야마가타가 느꼈을 감정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가 이를 저지하지 못한 것은, 이토가 주요 기업 및 관료와 결탁했고, 민당파의 일부도 호응해줬으며,
무엇보다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원로는 물론, 메이지 덴노 역시 이토의 활동을 지지해줬기 때문이었다.
1900년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었다.
직접국세 10원 이상 납세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며 유권자는 두배 이상 증가했고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는 입헌정우회의 창당을 선언했다.
입헌정우당이 아닌 입헌정우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친목회의 탈을 쓴 정당이며
초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지만 초연주의 및 번벌파와의 연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상태로 창당된 것이었다.
애초에 이토 히로부미 자신부터가 초연주의자이자 조슈번 출신의 번벌파이니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창당 과정에서 이토에게 협력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사이온지 긴모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원로,
이와사키 야타로 등 미쓰비시, 미쓰이 등 대기업 재벌,
호시 도오루를 중심으로 한 헌정당(구 자유당계), 헌정당의 경우 입헌정우회에 합당해 입헌정우회의 의석 기반이 되었다.
정당 운영 자금의 경우, 미쓰비시의 지원금과 메이지 덴노가 하사한 창당 축하금이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창당 멤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 사이온지 긴모치, 스에마츠 켄초, 와타나베 구니타케, 가네코 겐타로 등의 원로 및 번벌파
호시 도오루, 마츠다 마사히사, 하야시 유조 등의 구 자유당계 헌정당 출신 의원,
이와사키 야타로 미쓰비시 상사 창업주의 사위이자 외교관인 가토 다카아키,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천한 관료 출신 언론인 하라 다카시(창당 멤버는 아니지만 이후 합류)
등등등
이토 히로부미가 번벌파와 민당파를 아우르는 우익 빅텐트 정당 입헌정우회를 창당했고
이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좌시할 리는 없었다.
입헌정우회가 이토 중심으로 창당되어, 이토 중심의 당이 되었지만
더이상은 이토 중심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야했다.
이토가 당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입헌정우회의 화력은 급감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야마가타는 원로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야마가타도 정치 감각이 좋았고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190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직을 사임했고 차기 총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대해버렸다.
입헌정우회의 중추적 역할로 자리하기도 전에 이토는 총리로 돌아가버렸고,
비록 호시 도오루, 사이온지 긴모치, 스에마츠 겐초 등 입헌정우회 인사들이 대거 내각에 참여했지만
문관임용령에 의해 입헌정우회의 영향력이 내각에 미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육군대신 가쓰라 다로 등 야마가타파 인사가 내각에 남아있어서 견제도 가능했다)
내각의 활동을 견제하는 건 제국의회이거나 원로만 가능한데, 야마가타 아리토모 스스로가 이미 원로이니
추밀원을 이용해 내각을 견제하는 것도 수월했다.
1901년(메이지34)
이번 글에서는 전부 생략한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군부는 군비 확장 및 예산안 조정을 강요했고,
당연하게도 제국의회 중의원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토 역시 군비 확장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귀족원 의원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달랐다.
결국 귀족원에 의해 군비 확장안이 통과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장대신 와타나베 구니타케 등이 사임하면서
결국 4차 이토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임시 내각을 구성했고, 원로로 돌아간 이토 히로부미가 야마가타와의 정쟁을 지속했다.
이러한 정국을 해결할 인물로 이노우에 가오루가 차기 총리에 지명되었으나
내각 조성에 자신이 없다며 이를 사양했고, 결국 이토파냐 야마가타파냐의 구도가 지속되었다.
(이노우에는 해외 활동이 많아, 이토나 야마가타와 달리 정치적 세력 확장에 실패했음)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도 더이상 정치 전면에서 활동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고,
추밀원을 중심으로 정치의 뒷선에서 활동하고자했다.
이는 야마가타도 비슷했고, 양측의 정치적 충돌은 이제 불가피했다.
러일 갈등이 본격화되었던 1901년, 이토와 야마가타는 회담을 가졌고
가쓰라 다로가 차기 총리에 오르는 것에 동의하고, 이후에는 사이온지 긴모치,
그 다음에는 가쓰라와 사이온지가 번갈아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는 것에 합의하게 되었다.
실제로 1901년부터 1913년까지 13년 간 가쓰라와 사이온지 번갈아 정권을 차지했고, 이를 게이엔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이토는 일본의 외교적 입지를 위해 유럽 순방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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